[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34> 4·3발발 원인 취재 ④

   
 
  고문치사 희생자 양은하의 어머니 윤희춘 할머니(왼쪽 사진·당시 97세)를 취재하고 있는 필자(1994년 KBS TV 화면). 4·3 때 토벌대에게 두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윤 할머니는 피를 토하다보니 목에 아기 주먹만한 혹들이 생겼다.  
 

어린이 공부방 크기 한 방에 35명 가두어
1948년 3월 중학생 등 3명 잇단 고문치사

4·3발발 원인 취재 ④
1947년 3·10 총파업을 물리력으로 제압한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과 배경은 철저히 무시한 채 파업 관련자 검거와 탄압에 매진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문제를 오로지 이데올로기적 시각으로만 접근했다. 한달만에 검속된 사람이 500명으로 늘어났고, 계속적인 검거선풍으로 4·3 직전까지 2500명이 수감됐다. 제주출신 관료들은 행정기관의 주요 요직에서 물러났다.

특히 경찰 쪽이 심했다. 파업에 동참했던 제주출신 경찰관 66명은 전원 파면되었다. 대신에 육지부 철도경찰 출신들이 대거 제주지역 경찰로 배속되었다. 이 무?제주지역 경찰 수는 500명으로 급증했다. 이는 불과 2년전인 일제 말기의 경찰 수 101명보다 무려 다섯배나 늘어난 것이다. 여기에 서청 단원들이 가세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본토 사람들에게 배타적인 제주인들과, 섬 주민을 경시하는 육지 출신 경찰·서청 단원들은 물과 기름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1947년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에 이어 우도 경찰파견소 피습사건(3월 14일), 중문 발포사건(3월 17일), 종달리 6·6사건(6월 6일), 북촌 발포사건(8월 15일) 등 민중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건이 잦아졌다. 백색 테러도 잇따랐다.

1947년 하반기부터는 중산간마을 곳곳에 이색적인 '마을 보초'가 생겨났다. 마을 주민들은 이들을 '빗개'라고 불렀다. 마을 보초는 '오름' 꼭대기에 마을 안에서나 밭에서 볼 수 있도록 장대를 세웠다가 경찰이나 서청 단원들이 마을 쪽으로 오는 모습이 보이면 그 장대를 쓰러트렸다. 그것은 곧 주민들에게 '피신하라'는 신호였다.  

1947년 12월 제주 미군 CIC는 의미심장한 보고를 한다. 그것은 "제주도의 여론은 만일 경찰이 빠른 시일 내에 정의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모든 조직들이 제주경찰감찰청을 공격하리라"는 첩보였다. 극우파인 유해진 도지사를 암살해야 한다는 삐라도 나돌았다.

제주사회의 긴장감이 높아가자 미군정청은 넬슨 중령을 제주에 내려 보내 1947년 11월부터 1948년 2월까지 유해진 도지사와 제주도 군정청, 경찰 등을 대상으로 특별감찰을 실시했다. 이 감찰 결과 '10×12피트의 유치장 한 방에 35명이 수감됐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1피트가 30.48㎝이므로 이를 평수로 환산하면 3.3평이 된다. 어린이 공부방만한 3.3평에 35명을 가두었다는 뜻이다. 정치적 반대파의 탄압에만 몰두해온 유해진 도지사의 행적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넬슨 중령은 감찰 보고서를 통해 유해진 지사의 교체, 제주경찰에 대한 조사, 과밀 유치장 조사 등을 건의하지만 즉각 시정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3월 경찰에 연행됐던 학생과 청년 등 3명이 고문치사로 숨지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해 제주사회가 요동쳤다.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원 2학년 학생 김용철이 거꾸로 매달린 채 곤봉으로 매질을 당하다 숨졌다. 모슬포지서에서는 양은하 청년이 머리채가 천장에 매달린 채 고문을 당하다 절명했고, 금릉리 청년 박행구는 서청 경찰대에게 뭇매를 맞고 숨졌다.

4·3취재반은 이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을 심층 취재했다. 특히 김용철 학생의 시신을 검시한 장시영 의사(전 제주도정자문위원장)의 증언을 통해 경찰이 검시한 의사를 회유 협박하면서 '지병에 의한 사망'으로 조작하려 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러나 소신껏 사인을 규명한 검시 의사는 그 일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부산으로 출향했고, 끝내는 해병대 지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 보수 진영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마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한 보수 논객은 자신의 4·3 자료집에 '대공전문가 K씨의 글'이라면서 "고문치사를 당했다는 김용철은 현재 조천리에 멀쩡히 살아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내용을 재확인했더니 조천에는 '김용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 있었다. 대공전문가는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마치 고문치사 사건이 없는 것처럼 목소리만 높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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