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35> 4·3발발 원인 취재 ⑤

무장 봉기 준비한 '제주남로당 선택' 조명
조몽구 가족 6명 몰살, 본인은 10년형 선고

4·3발발 원인 취재 ⑤

   
 
  '제주남로당의 선택'으로 정리한 '4·3은 말한다' 4·3 前史 마지막회 기사. 미니박스 기사를 통해 길어진 연재에 대한 독자의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제주4·3 발발과 남로당 조직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4·3봉기를 주도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4·3과 남로당 관계를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양정심 '제주4·3항쟁 연구'·성균관대학교·2005년) 등 객관적인 학술자료가 있지만, 4·3취재반 출범 초기에는 '남로당은 악'으로 대변되는 관변자료가 대부분이었다.  

남로당의 실상을 이해하는데는 김남식 선생의 도움이 컸다. 그는 「남로당 연구」 등을 저술한 당대의 최고 전문가였다. 1989년 12월 취재반과 처음 만난 그는 남로당은 미군정 시절에 합법 정당이었고, 다만 미군정포고령 2호 위반죄(무허가 집회 참석, 폭동 모의 등)로 제재받는 일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1948년 4월 무렵 남로당 중앙당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위해 김구·김규식까지 참석하는 평양대회(4월 20일)에 온 정성을 쏟고 있었지, 당을 난처하게 만들 무장투쟁 지령을 내릴 턱이 없었다면서 4·3봉기는 제주도당의 돌출적인 현상이라고 단언하였다.

항일운동가들이 주도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해방공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집단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당 이름을 전면에 내세워 활동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신 인민위원회 혹은 민전 등의 조직을 통해서 대중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베일에 가려졌던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이 1948년 1월에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경찰에 붙잡힌 조직부 연락책의 전향으로 조직 내부가 드러난 것이다. 경찰은 1월 22~26일 사이에 남로당 당원 등이란 이유로 221명을 검거했다. 곧이어 전국적으로 전개된 '2·7 구국투쟁' 때도 제주도에서 290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연행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의 풀려 나왔다. 김영배 제주경찰감찰청장이 "경찰은 남로당에 가입한 자를 탄압하는 게 아니고 그들의 비합법적 행동에 철퇴를 내리는 것"이라고 밝혔듯이 남로당이 공식적으로는 합법정당이므로 남로당 당원이란 이유만으론 제재를 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는 5·10선거를 앞둔 미군정이 내린 특사령도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앉아서 죽느냐, 일어서서 싸우느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이때 당면한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은 대중선동의 좋은 명분이 되었다. 잇따라 발생한 3건의 고문치사 사건도 자극제가 되었다. 결국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을 수호하는 한편 군정당국에 등 돌린 민심을 이용, '탄압에 저항하고 통일국가 건립을 가로막는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슬로건을 내걸어 무장봉기를 준비하게 된다.

「제민일보」 '4·3은 말한다' 134회(1992년 11월 3일자)의 제목은 바로 '제주남로당의 선택'이었다. 여기에서 남로당 실체와 관변자료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색다른 시도를 했다. 그것은 경찰 자료에서 '폭도의 괴수'라 일컬은 남로당 제주도위원장 조몽구의 생애에 대한 조명이었다.

조몽구 때문에 그의 아버지, 아내뿐만 아니라 조미연(9살)·남철(7살)·미근(4살)·남후(2세) 등 네자녀가 1948년 12월 표선백사장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 '괴수'라는 조몽구는 1951년 9월 부산에서 검거되었는데, 대한민국 법정이 내린 그의 죗값은 징역 10년이었다. 옥살이를 마친 그는 고향인 성읍리에 돌아와 7년을 더 살다가 1973년 병사한다. 4·3취재반은 이 말도 안되는 모순을 역사에 물은 것이다.

4·3의 전사(前史)는 이렇게 134회로 마쳤다. 그것이 나중에 「4·3은 말한다」 제1권으로 출간되는데, 그 분량이 608쪽에 이르렀다. 134회 연재기사에는 "4·3 전사 부분이 다소 장황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4·3의 진상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4·3 발발 이전의 제주도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상황과 미·소를 둘러싼 한반도 정세 등을 파악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글을 별도로 실었다. 지금도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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