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36> 「제주경찰사」 파문

"4·3사망자 9345명, 민간인은 1330명"
 10년만에 도민 항의로 왜곡부분 삭제

「제주경찰사」 파문

   
 
  「제주경찰사」의 4·3 왜곡사례를 보도한 「제민일보」1991년 1월 5일자 기사. 왜곡내용을 수정하는 데는 10년이 걸렸다.  
 

"경찰관 순직 120명, 민간인 피살 1330명, 공비 사살 7895명. 공비는 사살자 이외에도 7061명이 생포되었으며 2004명을 귀순시켰다"

"2월 15일 세칭 <북촌사건>이 발생했다. 이 마을을 습격한 공비들은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마을 남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거나 납치해 갔다. 토벌대가 공격해 가자 공비들은 일부는 산으로 도망가고 일부는 마을로 숨어들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장시간 소탕전이 벌어지고 북촌리는 황폐한 마을이 되어 버렸다"

1990년 제주도경찰국이 발간한 「제주경찰사」에 나오는 글이다. 이 내용대로라면 4·3 사망자 숫자는 '9345명'에 불과하다. 또 '폭도' 혹은 '빨갱이'로 지칭된 공비의 숫자는 '1만6960명'(사살자, 생포자, 귀순자 포함)에 이른다. 400명 가까운 주민이 군인에 의해 학살된 북촌 사건은 '공비에 의해 저질러진 것'처럼 가해자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오라리 방화사건'을 비롯하여 왜곡사례가 수두룩하였다. 1990년대만도 해도 이런 말도 안되는 글이 공공기관 발간물에 버젓이 실리곤 했다.

필자는 「제민일보」 1991년 1월 5일자에 "엉뚱한 '4·3희생자' 집계"란 제목으로 「제주경찰사」의 왜곡사례를 지적하는 기사를 썼다. 다른 4·3 희생자 통계 자료를 열거하면서 경찰사의 '사망자 9345명'은 축소 의혹이 있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북촌 사건, 오라리 방화사건의 왜곡 사례도 지적했다.

그러나 경찰 당국은 마이동풍이었다. 이런 중대한 왜곡사례가 지적됐음에도 누구 하나 거들어 주는 세력도 없었다. 지금 같으면 당연히 4·3유족회 등이 나설 일이지만, 그 때는 반공 색채를 띤 유족회여서 오히려 경찰 쪽을 두둔하는 입장이었다.

경찰은 되레 4·3취재반을 압박해왔다. 「4·3은 말한다」가 연재될 때마다 경찰관들이 증언자의 집을 찾아다니며 그 증언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작업을 벌였다. 증언자들은 불쾌한데다 심적 압박을 받아 더 이상의 증언을 꺼리기도 했다.

취재반으로서는「제주경찰사」를 수정하는 작업보다는 「4·3은 말한다」연재를 지키는 것이 더 화급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냥 물러설 수 없어서 '공비의 소행'으로 가해자를 뒤바꾼 북촌리 민간인 학살사건을 희생자 제사 날짜에 맞추어 심층 보도하였다. 「제민일보」 1991년 2월 4일자 톱기사의 제목은 "40년 한 서린 '무남촌(無男村) 제삿날'/ 한날 한 마을서 주민 4백명 학살"이었다. 그 사건의 가해자는 '2연대 3대대 군인들'임을 분명히 밝혔다.

그 후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2000년 10월 「제주경찰사」 개정판이 나왔다. 그런데 경찰 당국은 10년 전에 문제가 제기됐던 4·3 관련 왜곡내용을 전혀 수정하지 않은 채 그대로 실었다. 그 10년 사이에 4·3 연구는 대단한 진전이 있었다. 4·3유족회도 그 대오가 정비되어 반공색채가 사라졌고, '행방불명인 유족회'까지 발족된 상태였다. 상설조직인 4·3도민연대 등 관련단체도 강화되어 있었다. 그 결과로 '4·3특별법'이 제정됐고, 4·3위원회가 발족되어 정부 차원에서 진상규명 작업도 나선 터였다.

경찰은 이런 변화를 간과한 것이다. 「제주경찰사」 개정판의 4·3 관련 왜곡 사실이 알려지면서 4·3 진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유족회와 4·3 관련단체들은 '제주경찰사 4·3역사 왜곡 도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경찰사 전량 회수 폐기와 관련자 문책을 요구하였다. 2000년 11월 24일 제주경찰청사 앞에서 북촌사건 희생자 유족 등 300여명이 모여 '4·3역사 왜곡 규탄 도민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에 11월 30일 제주경찰청 회의실에서 남국현 청장 등 경찰 간부와 도민대책위 대표 연석회의가 열렸으나 첨예한 입장 차이만 드러냈다. 남 청장은 "과거 선배가 한 일을 객관적인 자료도 없이 어떻게 수정하느냐"고 버텼다. 그런 경찰이 하루 만에 입장을 번복하게 된다. 즉 「제주경찰사」를 전량 회수하여 73쪽에 이르는 4·3 관련 부분을 삭제하게 된 것이다. 그 이면에는 추미애 국회의원의 역할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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