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37> 재일 제주인 취재

   
 
  1994년 4월 오사카에서 강연하고 있는 필자. 이 강연에서 필자는 "그 처절했던 역사가 여러분의 가슴에 화석으로 남은 것 같다"고 말했다.  
 

  4·3으로 인한 트라우마 한국보다 심각
 "50년 냉동되다보니 화석화하였다" 강연

재일 제주인 취재
4·3 취재가 본격화되면서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동포에 대한 조사가 필요해졌다. 재일 제주인의 삶에 대한 조사를 해온 문경수 교수(일본 리츠메이칸대학교)는 "4·3을 전후하는 시기 대략 5000~1만명의 제주인이 일본에 밀항해 온 것으로 짐작된다"고 밝힌 바 있다. 일제식민시대에 일본에 장기간 거주했던 경험이 있던 제주인들은 4·3 전후로 탄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 현해탄을 건넌 것이다. 개중에는 유격대에 직접 참여했던 활동가들도 있었다.

4·3취재반은 1990년부터 필자와 김종민 기자가 번갈아가며 일본 취잿길에 나섰다. 제일 먼저 만나고 싶었던 사람은 일본에서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1963년)와 「제주도 피의 역사」(1978년)를 집필한 김봉현이었다. 해방직후 오현중학원 역사교사와 제주민전 문화부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4·3 발발 직전에 일본으로 떠났다. 그는 김민주(조천중 학생으로 입산했다가 잡혀 옥고를 치른 후 일본으로 밀항)와 공저로 무장투쟁사를 발간했는데, 그 책이 1980년대 '대학가의 4·3 교본'이 되다시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는 4·3의 전체 흐름을 다룬 첫 역사 저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지만, 좌익적 시각에 편향되어 있을뿐더러 과장된 면이 많았다. 가령 1948년 4월 3일 유해진 지사 등 41명의 '반동분자'(우익인사) 집을 기습 파괴했다면서 그 명단까지 모두 나열하고 있으나, 취재반의 확인 결과 그 가운데 실제 피습을 받은 인사는 5명에 불과했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부풀려진 내용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 집필 경위를 묻고 싶었다.

1990년 11월 오사카 이쿠노쿠(生野區)의 한 다방에서 만난 그는 70대 초췌한 모습의 노인이었다. 그는 4·3사태를 피해 일본에 온 사람들로부터 고향의 참상을 듣고 비분을 느꼈다. 그래서 증언 채록을 시작했고, 결국 피의 역사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과장된 내용이 많다는 필자의 지적에 그는 "체험자들의 증언에 의존했고, 그 내용을 재확인하거나 검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과장된 점도 있었을 것"이라고 실토했다.

4·3취재반은 일본 취잿길에서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닥쳤다. 일본에서는 한국보다 더 자유스런 분위기 속에서 4·3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웬일인지 재일 제주인들은 입을 꽁꽁 다물었다. 이야기를 해달라는 계속되는 요청에 "내가 4·3 이야기를 하게 되면 고향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들이 다시 고통을 받을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재일동포들의 이런 답변은 사전에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건이 난지 무려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분들의 생각과 사고는 4·3 당시의 처참한 현장에서 시계추가 멈추어 있음을 느꼈다. 한국에선 이미 4·3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음에도, 재일동포들은 자신의 증언이 4·3 때처럼 친척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4·3으로 인한 심리적 트라우마(trauma)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심하게 나타난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에는 민단과 조총련으로 대표되는 재일동포 단체의 역할도 한몫을 하였다. 한국정부를 지지하는 민단은 공산폭동론에 입각해서 4·3의 거론자체를 금기시해 왔다.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도 1950년대 후반부터 4·3을 묵살하는 자세로 일관했다. 북한에서는 남로당계 숙청작업과 1955년 남로당 당수 출신 박헌영을 미국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처형한 이후에 4·3을 포함한 남로당 관련 활동을 묵살, 또는 폄훼하는 작업이 추진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1990년을 시작으로 10여 차례 일본을 방문, 재일 제주인들을 대상으로 4·3 취재를 해왔다. 1994년부터는 수차례 강연도 하였다. 첫 강연에서 재일동포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4·3을 고기로 비유한다면, 한국에서는 냉동실에 보관했던 고기를 현재 냉장실로 옮겨 해동하고 있습니다. 곧 진실규명이라는 요리가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와 보니 4·3은 여전히 냉동상태입니다. 그 처절했던 역사가 50년 가까이 냉동되다보니 여러분의 가슴에 화석으로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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