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40> 다랑쉬굴 취재기 ②

   
 
  1992년 3월 29일 1차 합동조사 때 동행했던 채정옥 선생(당시 67세)이 "저 시신들은 내가 정리한 시신들이 맞다"면서 그날의 참상을 설명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종민·채정옥·김동만·필자·고홍철  
 

토벌작전에 참여했던 민보단 간부 증언
경찰, 다랑쉬굴을 남로당 아지트로 몰아

다랑쉬굴 취재기 ②
1992년 3월 29일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4·3취재반의 다랑쉬굴 합동조사 현장에 동행했던 채정옥 선생은 4년 전 취재반에게 알려줬던 내용을 다시 한번 자세히 증언했다.

"사건이 나던 날은 1948년 12월 18일로 생생히 기억나요. 나도 희생자들과 함께 다랑쉬굴에서 같이 살았지요. 토벌대가 덮쳤을 때 나는 마침 다른 굴에 가 있었기에 참변을 모면했고요. 사건 발생 다음날 일행 2명과 함께 다랑쉬굴에 와보니 입구에 불을 피웠던 흔적들이 있었고, 굴속에는 그때까지 연기가 가득했어요. 연기에 질식된 희생자들은 고통을 참지 못한 듯 돌 틈이나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숨져 있었고 눈, 코, 귀에서 피가 나있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지요"

그는 일행들과 함께 시신들을 나란히 눕혔다고 한다. 희생자들은 종달리와 하도리 사람들이었다. 눕힌 순서대로 이름을 적었는데, 그 쪽지를 피신 다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하산하여 당국의 조사를 받은 후 선무공작대에서 일을 했고, 6·25가 터지자 육군으로 출정하였다.

"유족들에게 알렸어야 했던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당시 상황이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었고, 6·25 참전 등으로 경황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몇년이 지난 후 혼자서 굴을 찾아 나섰지만 이번에는 굴 입구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40여년 동안 유족들에게 말도 못하고 가슴에 묻어왔다고 했다. 우리는 희생자와 유족에게 미안해하는 그를 달래며 희생자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해달라고 부탁했다. 

합동조사 결과 우리는 이 다랑쉬굴이 4·3의 참혹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현장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신문인 제민일보의 보도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중앙지와 방송에까지 알려 함께 보도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이때 굴 이름을 어떻게 부를 것이냐는 내부 논의가 있었다. 지역 주민들은 이 지역을 속칭 '선수머세'라고 불렀다. 그러니 '선수머세굴'이라고 지칭해야 하지만, 인근에 '다랑쉬오름'과 4·3 때 폐촌된 '다랑쉬마을'이 있다기에 '다랑쉬굴'로 부르기로 정리했다. 

그래서 이틀 뒤인 4월 1일 동아일보, 한겨레신문, 제주MBC 취재진까지 참여한 2차 합동조사가 실시됐다. 필자는 아직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있다. 언론사를 특정하지 말고 모든 언론에 공개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미련 때문이다. 이때 언론사를 특정함으로써 제외된 언론으로부터의 역풍이 거셌다. 2차 합동조사에는 취재진 이외에 최병모 변호사, 이청규 제주대 박물관장, 전신권 정형외과 전문의 등이 함께 하였다. 사후 처리를 보다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법률·사학·의학 전문가를 참여시킨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4월 2일 신문과 방송 보도로 다랑쉬굴 유해 발굴사실이 전국에 알려졌다. 각 언론사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제민일보」는 4월 2일자 3개 면을 할애해 유해 발굴사실을 자세히 보도하는 것을 시발로 연일 다랑쉬굴 참상의 진실을 파헤쳐갔다. 시신을 수습한 채정옥 이외에 직접 토벌현장에 참여했던 민보단 간부 오지봉을 찾아낸 것도 큰 수확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 12월 18일 9연대가 주도한 대대적인 군·경·민 합동 토벌작전이 있었고, 다랑쉬굴을 발견하게 되자 "토벌대가 처음엔 입구에 수류탄을 던졌고 그래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굴 입구 쪽에 불을 피운 후 구멍을 막아 질식사시켰다"는 결정적인 증언을 얻어냈다.

이런 충격적인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도 즉각 현장조사 등을 통해 진상조사에 나섰다. 경찰은 토벌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사하더니 곧 다랑쉬굴이 남로당 아지트로 추정된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한 한 지방지는 톱기사 제목을 "다랑쉬동굴 남로당 유격대 아지트였다"고 단정적으로 달아서 보도하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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