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42> 다랑쉬굴 취재기 ④

 '유족의 뜻'이라고 하지만 특정인이 주도 
  법적으로 '자격 없는 유족'이 대표 행세

다랑쉬굴 취재기 ④

   
 
  한줌의 재로 변한 다랑쉬굴 유해를 바다에 뿌리며 오열하는 유족들. 취재기자로는 유일하게 승선한 김종민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원사진이나 필름이 사라져 「4·3은 말한다」 책자에 실린 것을 재인용하다 보니 상태가 흐릿하다.  
 

1992년 5월 4일 구좌읍장실에서 구좌읍장과 일부 이장, 유족 대표들이 모여 다랑쉬굴 유해 사후처리를 협의한 결과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날의 회의록을 보면 행정당국에서는 매장하기를 바랐으나, 유족 대표가 화장하는 쪽을 강력히 희망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동안 떠돌던 풍문이 현실화된 것이다.

행정당국은 이때부터 "유족들의 뜻에 따라서…"라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그리고 모든 장례절차는 구좌읍장이 추진하는 것으로 결론이 나 있었다. 이런 장례 방안을 강력히 주장한 '유족 대표'는 고 아무개였다. 그는 어이없게도 직계유족이 아니었다. 어느 희생자의 5촌뻘 친척으로, 유족 범위를 확대한 현행 4·3특별법에 의하더라도 법적인 '유족'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울산에 사는 희생자의 아들로부터 위임받았다면서 유족 대표 행세를 했다.

필자는 당시 육십대 중반의 그를 직접 만나 화장을 주장하는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는 유족 상당수가 육지부에 나가 살고 있기 때문에 무덤을 만들면 고향에 있는 유족들만 벌초하는 번거로움이 있다고 들이댔다. 필자가 합장묘를 만들면 그런 문제는 풀 수 있다고 제기하자, 이번에는 세화 습격사건과 연계하며 "무덤을 만들면 세화리 피해유족들이 똥과 오줌을 쌀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이댔다. 유해를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기로 단단히 작심한 사람이었다.

필자는 그 길로 이윤식 구좌읍장을 만났다. 읍장은 유해 화장은 유족의 뜻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 유물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유족의 뜻에 따라 폐기처분하겠다는 것이 읍장의 답변이었다. 필자는 "굴에 있는 물건들은 단순히 유족들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역사적인 유물"이라고 강조하면서 현장에 그대로 보존해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5월 15일 새벽 다랑쉬굴 유해 11구가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유해는 빛을 쬐자마자 바로 화장장으로 옮겨졌다. 당초 유해는 다랑쉬굴 현장에서 장례식을 마친 뒤 오전 8시에 현장을 떠날 계획이었으나 어떤 영문인지 1시간 앞당겨졌다. 따라서 장례식에 참석하려던 제주도의회 장정언 의장과 이영길·이재현 의원, 취재기자들은 헛걸음을 하고 급히 화장장으로 향해야 했다. 동굴 입구는 다시 커다란 돌로 봉쇄되었다. 그나마 유물은 그대로 굴속에 남겨졌다.

화장장에서 한 유족이 "뼛가루 11분의 1을 주면 따로 매장하겠다"고 나섰지만 거절당했다. 화장된 유해는 김녕 앞바다로 옮겨져 바다에 뿌려졌다. 마지막 떠나는 현장을 기록하기 위해 유족들이 탄 배에 승선하려던 김종민 기자는 경찰의 방해로 심한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이를 보던 유족들의 거센 항의 덕분에 겨우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한 줌의 재로 변한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며 울부짖는 유족들의 모습을 촬영한 유일한 취재기자였다.

외압이 없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이 일의 사단은 그 이해할 수 없는 '유족 대표'에게 있었다. 뒤늦게나마 그의 가족사를 알아보았다. 그런데 취재에 나섰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항일투사였다. 해녀항쟁의 배후 인물로 지목받아 일경에 잡혀 1년간 옥살이도 했다. 그런 독립투사가 해방 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북송선을 타고 말았다는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그 '유족 대표'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은 쉽게 짐작이 갔다. 그 빈틈에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가 작동했을 것이다. 공안당국은 다랑쉬굴 희생자들의 무덤이 만들어지는 것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이나 재야인사들의 '순례 성지'가 될 것이 뻔히 예견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조사가 필요했다.

필자는 이 연재를 앞두고 그 '유족 대표'를 다시 만나 보기로 했다. 수소문했더니 아뿔싸, 그는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생전에 유족의 자격을 위임받았다고 했던 울산의 직계 유족을 찾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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