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45> 강요배의 '4·3역사화'

   
 
  2003년 강요배 개인전이 열린 서울 학고재화랑에 나란히 선 현기영(왼쪽), 강요배, 필자  
 

 한겨레신문 소설 삽화 그리다 큰 꿈 세워
"난해한 역사, 민중의 눈높이에서 재해석"

강요배의 '4·3역사화'

   
 
  1992년 제민일보에 실린 '강요배 역사그림전' 사고(社告)  
 

다랑쉬굴 유해 발견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던 1992년 4월, 서울과 제주에서 기념비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강요배 화백의 '제주민중항쟁사 역사그림전시회'였다. 4·3이 웅혼한 대 서사시적인 그림으로 재현된 이 전시회는 서울전(4월 3~11일, 학고재화랑)에 이어 제주 전시회가 제민일보 주최로 4월 21일부터 세종미술관에서 열렸다.

이 전시회에는 제주도내 전시사상 최대 관람인파로 기록될 정도로 연일 사람들이 몰렸다. 4월 27일까지 계획했던 전시 일정도 연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시회에는 4·3 역사를 시대별로 다룬 크고 작은 화면의 펜화, 연필화, 유화 등 연작그림 50점이 선보였는데, 그 장대한 스케일의 역사화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그림 앞에 선 여고생들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서 그 감동이 또 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도 전율을 느낄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은 전시회였다.

강요배는 1952년 제주 삼양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와 같은 대학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후 한때 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활동했다. 4·3과의 인연은 1988년 한겨레신문 연재소설 현기영의 「바람타는 섬」 삽화를 그리면서 시작되었다. 이 소설은 일제시대 제주해녀항쟁을 다뤘다. 이후 잦아진 현기영 선생과의 술자리는 4·3을 비롯한 제주 역사를 깊이있게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 그가 직장으로 다니던 출판사가 문을 닫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는 위궤양 수술까지 받았다. 심신이 힘들던 시절이지만 그는 '의미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본격적인 4·3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4·3을 그리기로 결심한 그는 1989년 경기도의 한 쇠락한 농가를 빌려 작업실을 만들었다. 그 속에서 피나는 노력 끝에 3년만에 50점의 4·3 역사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는 작업과정에서 4·3 영령들을 만나는 느낌이 있었는데, 영령들은 무언의 압력을 주기도 하고 힘도 되었다고 술회했다.

강요배의 4·3 역사화는 많은 화제를 불렀다. 난해한 역사를 민중의 눈높이에서 일반 대중에게 쉽게 접근시킨 4·3역사화는 미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는 찬사에서부터 일반 기념관이나 박물관의 역사기록화와도 차별성이 있다는 평가가 있었다. 사실적인 인물 묘사도 압권이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서울대 미대 단짝 동창인 박재동 화백은 강요배의 그림전을 관람하던 중 숨이 턱 막혀왔다고 한다. 피로 물든 표선백사장을 형상화한 그림 '붉은 바다' 앞에서였다. 박 화백은 그 순간 "내가 무얼 하고 있지?"라는 자각과 충격이 왔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한겨레 그림판'을 그리던 유명한 시사만화가였다. 박재동은 그 길로 한겨레신문사를 그만 두고, 4·3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오돌또기' 제작 작업에 들어간다.
강요배의 역사화는 1992년 대구에서도 전시되었다. 그리고 1998년에는 제주4·3 50주년 기념으로 서울·제주·광주·부산·대구를 돌며 전시회를 가졌다.

한편, 강요배의 역사화는 화집 「동백꽃 지다」로 모두 세차례 출간되었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1992년과 1998년 학고재에서 나왔는데, '제주4·3민중항쟁의 전개과정'(양한권), '4·3은 무엇인가'(양조훈)란 글이 각각 실렸다. 세번째는 2008년 도서출판 보리에서 출판됐는데, 김종민이 취사 정리한 34명의 증언과 '제주4·3항쟁의 역사적 의미'(서중석)란 글이 실려 4·3에 대한 이해를 도와준다.

4·3 역사그림 작업을 마친 1992년, 마흔살의 나이에 귀향한 강요배는 현재 한림읍 귀덕1리에 정착해 20년째 제주 자연 등을 소재로 한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그림으로 대중들과 호흡하고 있다. "4·3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는 강요배. 그는 아직도 4·3에 대한 기대가 원대하다.

"우리 민족사 전체가 바로 잡히려면 평화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우리 민족의 과제에서 봤을 때 60여년전 제주도민들이 분단 반대의 슬로건을 내걸었던 것은 분명히 의미있는 역사이었지요. 언젠가 한반도 분단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제주4·3도 분단 거부 운동으로서 반드시 재조명될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4·3의 완전한 조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회는 '4·3 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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