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암기념관 큐레이터 이경은

   
 
   
 
 조선 후기, 최고의 명필을 꼽으라면 대부분 두말할 나위 없이 추사 김정희를 으뜸으로 칠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과 일찍부터 교유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던 당대에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한 추사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이가 바로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다.

 창암 이삼만은 1772년 정읍에서 태어나 일평생 글씨 쓰는 데만 몰두하여 '유수체(流水體)라는 필명을 떨치며 호남서단을 평정했던 인물이다. 창암이 추사보다 16살 위로, 추구했던 작품세계가 서로 달랐던 두인물이 결정적으로 부딪쳤던 일이 있었으니, 다음의 일화가 이를 잘 말해준다.

 추사 김정희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제주로 유배 가는 길에 전주에 들렀을 때, 익히 명성을 듣고 있던 창암의 제자들이 스승의 글씨에 대하여 추사에게 평을 청하였다. 추사는 그 글씨를 보면서 한동안 말이 없더니 "노인장께선 지방에서 글씨로 밥은 먹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창암의 제자들이 분노하자, 창암은 "저 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갈라지는 맛과 조선종이의 번지는 멋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언젠가는 다시 날 찾아 올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예언은 적중하였다고 전한다.

 창암 이삼만은 조선 후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오직 글씨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예인이다. 추사가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였던 유학파인데 반해 창암은 오직 지방에서 조선의 풍토에 걸맞은 서체연구에 매진하였다. 특히, 창암은 평범하지 않은 칡뿌리, 대나무, 꾀꼬리 털 등 실험적인 붓으로 작품을 제작한 사례가 보여주듯이 조선글씨의 독창성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창암의 서체미학은 한, 위시대의 고법과 통일신라시대의 김생의 글씨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자연에서 얻은 졸박한 아름다움의 '유수체'라는 자신만의 필법을 완성했고, 이것은 원교 이광사, 백하 윤순으로 이어져 내려온 '동국진체'를 심화, 확장시켰다는데 그 의미를 둘 수 있다.

 지난달 27일부터 7월 13일까지 소암기념관에서 열리고 있는 <창암 이삼만-물처럼, 바람처럼>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창암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고 나아가 조선의 글씨와 미학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경은·소암기념관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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