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46> 4·3 문화운동 ①

   
 
  1989년 4월 제주시민회관에서 열린 첫 4·3 추모제로 앞마당에서는 4·3 시화전이 열렸다.  
 

「순이삼촌」 이후 4·3소설과 시 잇달아 발표
  서울에선 해마다 '4·3 민족문학의 밤' 개최

4·3 문화운동 ①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비롯해 현길언·한림화 장편소설과 김명식·김용해의 시집  
 

4·3이 금기시되던 암울한 시절, 그 어둠을 뚫고 진실을 밝히려는 문화예술인들이 있었다. 작가들은 소설과 시와 희곡으로, 화가들은 그림으로 4·3의 참모습을 드러내려고 했다. 기억의 투쟁은 연극, 음악, 영상 등 다양한 장르로 번져갔다. 촛불 하나가 어두운 방을 밝히듯이, 그들은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내기 시작했다. 4·3의 문화적 재현, 즉 '4·3 문화운동'은 이렇게 태동되었다.

4·3 문학의 기폭제는 1978년에 발표된 현기영의 중편소설 「순이삼촌」이었다. 이듬해 책으로 출간된 현기영의 이 소설은 당국에 의해 즉시 판금되었지만, 은밀히 유통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전국의 많은 독자들이 4·3의 참극을 처음 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작품이었다. 현기영은 그 이후 단편소설 「도령마루의 까마귀」(1979), 「아스팔트」(1984)와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사, 1999) 등을 발표하면서 대표적인 4·3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1980년대 초반에는 현길언과 오성찬이 4·3의 비극을 드러내는 소설을 잇달아 발표하였다. 현길언은 단편소설 「귀향」(1982)과 「우리들의 조부님」(1982)에 이어 4·3의 전사(前史)를 다각도로 조명한 장편소설 「한라산」(3권, 문학과지성사, 1995)을 발표하였다. 오성찬은 단편소설 「사포에서」(1982)와 「단추와 허리띠」(1986) 등을 발표했고, 4·3체험자 증언록인 「한라의 통곡소리」(소나무, 1988)를 출간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고시홍과 한림화가 4·3소설의 뒤를 이었다. 고시홍은 단편소설 「도마칼」(1985)과 「계명의 도시」(1989) 등을 발표하였고, 1987년 단편소설 「불턱」을 썼던 한림화는 1991년에 4·3을 정면으로 다룬 첫 장편소설 「한라산의 노을」(3권, 한길사)을 출간하였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4·3 문학은 더욱 활성화되었다. 김석희·오경훈·김관후·이석범·정순희·김창집·함승보 등이 잇달아 4·3소설을 발표하였다.

4·3을 소재로 한 시 창작도 1987년 6월 항쟁 전후로 활발해졌다. 1987년에 결성된 제주청년문학회 동인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 문학회 소속 시인들은 1989년에 처음 열린 4·3 추모제 기간에 제주시민회관 앞마당에서 '용강마을, 그 피어린 세월'이란 이름으로 4·3 시화전을 열었다. 광목에 매직으로 시를 쓰는 형식이었지만, 이 행사는 처음으로 시도된 공개적인 4·3 시화전으로 기록되었다. 전시작품들은 곧 경찰에 압수되었다.

1989년에는 두권의 4·3 시집이 출간되었다. 김명식의 시집 「유채꽃 한 아름 안아 들고」(소나무)와 김용해의 시집 「민중일기」(동진문화사)가 그 시집이다. 김명식은 반미·반제 성향의 시를 활발하게 발표했는데, 4·3 자료집 「제주민중항쟁」(3권, 소나무)을 발간했다가 1990년에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옥고를 치른 뒤에도, 4·3 시집 「한락산-이 한 목숨 이슬같이」(1992, 신학문사)를 출간하였다.

이밖에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4·3을 소재로 시를 발표한 시인으로는 강덕환·고정국·김경홍·김경훈·김광렬·김규중·김석교·김수열·김순남·문무병·문충성·양영길·오승국·오영호·진순효·허영선 등을 꼽을 수 있다.

앞에 열거한 시인들은 모두 제주 출신이다. 그런데 '돌출적인' 시인이 있었다. 1987년 둥둥 북소리를 울리는 것 같은 충격과 파장을 몰고 온 4·3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발표한 이산하 시인이 그 주인공이다. 경북 영일 출신인 그는 그 시로 인한 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1989년 제주에 내려왔다. 그는 그때 "현장에 대한 취재 없이 재일동포가 쓴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등을 중심으로 '한라산'을 집필했다"면서 "이제 본격적인 조사를 해서 '진짜배기 4·3 시를 쓰겠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필자는 취재반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4·3은 조사하면 할수록 자칫 미로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제주에서 한두달을 보낸 이산하는 "체험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도저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 4·3 시를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면서 제주를 떠났다. 그는 그로부터 10여년 동안 시를 쓰지 못한 채 절필의 세월을 보냈다.

한편 서울에서는 1991년부터 제주사회문제협의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공동주최한 '4·3 민족문학의 밤'이 해마다 개최되었다. 1991년 서울 예술극장에서, 1992년 명동 YWCA회관에서 열린 문학의 밤 행사 등은 4·3 진실찾기 운동의 외연이 넓어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 다음 회는 '4·3 문화운동'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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