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48> 미군 4·3종합보고서 ①

 다른 미군 4·3보고서 비해 실체에 접근
"9연대, 집단학살계획 채택" 기록 남겨

미군 4·3종합보고서 ①

   
 
  「제민일보」 1991년 4월 2일자 1면 톱기사로 보도된 미군 4·3종합보고서 발굴 내용.  
 

1991년 3월 「제민일보」 4·3취재반은 비밀 해제된 미군 보고서를 검색하다가 뜻밖의 문건을 발견하였다. 그 무렵 밤을 새우며 미군 보고서와 씨름하던 김종민 기자는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9년 4월 1일자로 작성한 '제주도'란 제목의 4·3 관련 비밀문서를 찾아냈다. 보고서 분량도 적지 않은데다 제주도 상황을 종합 분석한 최초의 미군 보고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보고서 항목도 지리, 민중, 역사, 초기 군 작전, 현재의 작전, 게릴라 부대의 위치, 토벌대 병력수와 배치 상황, 경찰과 민보단 등 다양하게 세분되어 있었다. 내용을 검토해보니, 그때까지 보았던 여타의 미군 정보보고서에 비해서 세밀한데다 그런대로 객관적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럼에도 9연대의 초토화작전을 '성공적인 작전'으로 평가하는 등 우익적 관점에서 기록된 것은 변함이 없었다. 이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미군정 하의 1947년 3월 1일 경찰이 제주읍에서 삼일절 행사에 참가한 좌익의 무리들을 공격, 몇명의 사람들을 죽이기 전까지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편이었다. 경찰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 공격적인 섬 주민들에 의해 일어났고 이는 긴 기간의 유혈사태의 촉발이 되었다.

2) 9연대는 모든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서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게릴라에게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집단 학살계획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의 9연대 점령기간 동안에 주민 학살의 대부분이 자행되었다.

3) 2연대는 게릴라를 도와준 혐의를 받고 있는 해안마을 주민들에 대한 보복 수단에 한정하였으나, 주민들은 종종 재판 없이 대규모로 한꺼번에 처형당하였다.

4) 현재 통합부대장인 유재흥 대령은 사면전술을 채택했다. 현재의 정책은 작전 중에 잡혔거나 자발적으로 항복했거나 불문하고 산에서 내려온 모든 사람들을 구금하는 것이다. 여자, 어린이, 노인은 대부분 피난민으로 분류되고 있는 반면, 전투 가능 연령의 남자들은 피난민 지위가 부여되기 전에 철저히 심사되고 교육된다.

5) 현재 무장 게릴라들은 약 250명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게릴라들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탄약 부족이다. 일부에서는 게릴라들이 본토나 북한으로부터 병참 지원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으나 이러한 보고를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다.

6) 현재 토벌대는 한국군 2622명, 경찰 1700명, 민보단 5만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7) 지난 한해 동안 주민 1만4000~1만5000명이 사망하였으며, 이 가운데 최소한 80%가 진압군(보안군)에게 살해되었다. 주택 중 3분의 1이 파괴되었고, 주민 4분의 1이 자신들의 마을이 파괴당한 채 해안으로 이주하였다.

4·3취재반은 미군 종합보고서의 내용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1949년 3월 현재 인명피해 1만5000명/80%이상 진압군에 희생"이란 제목의 톱기사(1991년 4월 2일자 1면)에 이어 3일 동안 보고서 전문(全文)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4·3에 대한 연구성과가 높아진 지금은 이런 내용이 일반 상식처럼 되어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보고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바로 1년 전까지해도 "4·3 사망자는 9345명에 불과하고, 그 중 공비가 7895명이었다"는 내용이 담긴 「제주경찰사」(1990년)가 발간되던 시절이었다. 또한 강경 진압작전의 명분으로 소련 혹은 북한 선박 출현설을 들이대던 미군이 갑자기 '외부로부터 병참 지원이 없었다'고 꼬리를 내린 점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었다.

이 보고서 내용을 눈여겨보면 초토화까지 감행했던 강경진압작전이 얼마나 무모했고 실패한 작전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제주도는 일제말 일본 경찰 101명이 치안을 담당하던 지역이었다. 9연대와 2연대는 제주도 중산간 지대를 빗질하듯 휩쓰는 초토화작전을 펴면서 많은 주민을 학살했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1949년 3월에는 군경 4322명과 민보단 5만명을 동원해야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음을 자인한 것이다.

이 미군 종합보고서는 무엇보다 제주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평온했음에도 불구하고 1947년 3월 1일의 경찰 발포가 4·3을 촉발하였고, 토벌대에 의한 집단학살이 감행된 사실, 게릴라에 대한 외부의 지원이 없었음을 당시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갖고 있던 미군 지휘부가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필자는 이 보고서를 보다가 '특수부대' 부분에서 또 한번 놀랐다. "게릴라로 위장한 특수부대가 있었다"는 풍문이 사실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다음 회에 자세히 다루겠다.
 
☞ 다음회는 '미군 4·3종합보고서'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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