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49> 미군 4·3종합보고서 ②

   
 
  봉개리가 연대장과 작전참모의 이름을 조합한 '함명리'란 얄궂은 이름으로 바꾸어지기도 하였다.  
 

2연대 앨범 '폭도 가장한 대원' 사진 실려
군경 함정토벌로 곳곳서 주민 피해 속출

미군 4·3종합보고서 ②

   
 
  「제민일보」 1991년 4월 9일자 보도기사. '게릴라로 위장 / 4·3 당시 특수부대 있었다'는 제목이 붙여졌다.  
 

"제주도 주둔부대는 제2연대의 3개 대대와 정원 미달의 1개 특수대대, 제2연대의 전 작전참모 김명 대위가 지휘하는 50명의 특수부대로 구성되어 있다. 민간인 복장을 하고 일제 99식 소총으로 무장한 이 김명 대위의 특수부대는 선발된 게릴라 요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산악을 배회하다 폭도들과 만나면 사투리로 이야기를 하는 등 정보수집에 아주 가치 있는 조직이다"

이 내용은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1949년 4월 1일자)가 작성한 4·3 종합보고서에 나온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이 바로 '특수부대'(Special Unit)이다. 이 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특수부대에 대해 다음 몇가지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특수부대가 50명으로 구성되었다는 점, 둘째, 그 지휘관이 2연대 작전참모를 지낸 김명 대위라는 점, 셋째, 특수부대원들은 민간인 복장에 일제 99식총으로 무장했다는 점, 넷째, 이 특수부대는 붙잡힌 게릴라 유격요원 중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는 점, 다섯째, 미군은 이들 특수부대를 정보 수집원으로서 가장 가치 있는 조직으로 평가했다는 점 등이다.

당시 2연대 주력부대의 개인 화기는 미제 M-1소총이었다. 이 특수부대가 제주인의 노동복인 '갈중의'(갈옷)를 입고 낡은 일제 99식총으로 무장한 것은 '폭도'인양 위장하기 위함이다.

4·3취재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심층취재에 나섰다. 그리고 '폭도'로 위장한 특수부대원들의 사진이 실린 제2연대 앨범을 찾아냈다. 2연대가 제주에서 철수하던 1949년 8월 15일 제작된 앨범 '제2연대 제주도주둔기'는 그 머리말에서 제작 동기를 "8개월간의 성사(聖史)를 길이 빛내며 회고하고자 펴냈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첩으로 제작된 이 주둔기에는 민간인 복장을 한 일단의 대원들 사진을 싣고 있는데, '폭도(暴徒)로 가장(假裝)코'란 설명까지 달고 있었다. 대원 속에는 여자들도 끼어 있어서 눈길을 끌었다. 결국 게릴라로 위장한 특수부대가 4·3 토벌대로 활동한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4·3 토벌과정에선 비단 군대만이 아니라 경찰에서도 유사한 위장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이를 당해본 주민들은 "함정 토벌이었다"면서 몸서리를 쳤다.   

대표적으로 회자되는 사건이 제주읍 도평리 주민 피해사건이었다. 1949년 1월 3일 허름한 갈중의를 입고 총을 든 한 무리가 도평마을로 들어섰다. 그들은 길에서 마주친 주민들에게 "동무, 동무"하며 악수를 청하였다. 그리고 집안에 들이닥쳐 "왜 너희들은 산에 협조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면서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인근 외도지서 경찰과 특공대원들로서 주민들에게 함정을 판 것이었다. 이를 눈치 챈 주민들이 "우리는 대한민국이다", "빨갱이면 싸우겠다"고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게릴라로 가장한 토벌대는 주민 70명 가량을 총살하였다.

「제민일보」는 1991년 4월 9일 "게릴라로 위장 / 4·3 당시 특수부대 있었다"는 제목 아래 이런 사실을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서 특수부대의 공과에 대한 재조명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여담 하나를 덧붙이겠다. 제주읍 봉개리가 한때 '함명리(咸明里)'란 얄궂은 이름으로 개명된 적이 있다. 이 마을은 1949년 2월 제2연대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2연대는 제주 철수를 앞두고 중산간 원주지 복귀사업을 추진한다면서 시범적으로 봉개리를 재건하는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마을이름을 함병선 연대장의 '함'자와, 작전참모 김명의 '명'을 조합하여 '함명리'로 바꾸어버린 것이다.

병 주고 약 준 격이다. 토벌대 입장에서는 그런 작업이 '업적'이자 '공적'일 수 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로선 '수모'요, '수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4·3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시각 차이는 여기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마을 이름은 주민들에 의해 곧 '봉개리'로 환원되었다.

☞ 다음 회는 '달라진 제주도지 기록'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