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52> 제주도의회 4·3특위 ②

'이덕구 위패' 등 미스터리 잇따라 일어나 
 유족회 '굴절된 역사'란 표현도 문제 삼아

제주도의회 4·3특위 ②

   
 
  1991년 4월 3일 제주시 신산공원에서 4·3유족회 주최로 열린 4·3위령제. '제1회 합동위령제'란 이름이 붙여졌다.  
 

1993년 3월 25일 제주도의회 운영위원장실에서 4·3 합동위령제를 개최하기 위한 협상이 벌어졌다. 도의회 4·3특위(위원장 김영훈·간사 이영길)가 주선한 이 자리에는 4·3유족회에서 김병언 회장과 박서동 총무, 4월제 공준위 측에서는 고창훈·모갑경·양동윤·이용중 공동대표가 참여하였다.

제주도내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4월제 공준위는 1989년부터 4·3추모제를, 출범 초기부터 무장대에게 희생된 유족들이 지도부를 장악하는 등 반공색채가 강했던 4·3유족회는 1991년부터 별도의 4·3위령제를 봉행하였다. 4·3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위무하고 도민화합을 이룬다는 지향점은 비슷한데도 '한 지붕 아래 두 식구'처럼 4월 3일 당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위령행사를 치렀다. 이런 분열 양상에 도민들의 시선은 고울 수가 없었다.

이날의 회동은 바로 이런 문제를 극복하자는 취지였지만 합동위령제 공동 개최 안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다. 4·3을 보는 양측의 시각이 너무 달랐다. 4월제 공준위는 '민중항쟁론'으로 접근한 반면 당시 유족회 측은 '공산폭동론'을 앞세웠다. 결국 합동위령제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94년 3월 15일 양측은 다시 제주도의회 4·3특위의 중재로 회동을 하고 극적으로 합동위령제 봉행에 합의하였다. 도의회는 합의가 안되면 예산 지원을 할 수 없도록 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그 해의 행사 명칭은 '제46주기 제주4·3희생자 위령제'로, 주최는 양측이 공동 참여하는 '봉행위원회'에서 맡기로 정하였다. 4월제 공준위는 그동안 사용해왔던 '추모제'란 명칭을 고집하지 않았고, 유족회 역시 무장대 가담혐의가 있는 사망자도 '희생자' 명단에 넣는 것을 용인하였다. 다만 '도민의 정서에 맞지 않은 인사는 위령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1994년 4월 3일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열린 진짜배기 첫 합동위령제. 제주도 모형의 제단에 읍면별로 희생자 위패가 진설되었다.  
 
1994년 4월 3일 제주시 탑동광장에서 역사적인 합동위령제가 처음 봉행되었다. 모처럼의 화합 분위기 속에서 5000여명이 참석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예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위령제는 종교의식-경과보고(김영훈 4·3특위 위원장)-주제사(김병언 유족회 회장)-추모사(고창훈 4월제 공준위 대표)-추도사(신구범 지사, 장정언 도의회 의장, 지역구 국회의원 3명) 등으로 장장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다.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도리어 안한 것만 못하다는 뜻일 게다. 유족들은 이날 파김치가 되었다.

합동위령제의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다. 행사 당일 '이덕구 위패'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탑동 행사장에는 제주도 모형의 제단에 읍면별로 4·3희생자 위패가 진설되었다. 위패는 도의회와 4·3 관련단체에서 파악한 8989위와 그날 현장에서 접수된 희생자까지 합쳐 1만 위에 육박하였다. 그런데 그 속에 유격대 제2대 사령관 이덕구의 위패가 포함된 것이다. 유족회와 4월제 공준위 양측은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의도적으로 끼워놓았다는 것인데, 도대체 누가 그랬을까. 그것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두번째 사건은 유족회 측에서 뒤늦게 합동위령제 봉행에 관하여 색다른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것이다. 유족회는 4월 15일 공개적으로 "제주도의회 의장이 위령제 당시 '4·3을 굴절된 역사'라고 표현한 것은 4·3이 공산폭동이란 설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해명을 요구하였다. 장정언 의장은 추도사에서 "굴절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은 제주도민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도민 대화합의 기틀을 다지는 일"이라고 밝혔을 뿐이다. 유족회는 또한 김영훈 특위 위원장의 발언 내용, 위령제 행사장에 만장이 등장한 것까지 꼬치꼬치 문제 삼았다.

세번째는 이런 유족회의 태도에 4월제 공준위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난 것이다. 강경파들은 "공산폭동을 주장하는 유족회와 어떻게 합동위령제를 계속 치를 수 있느냐"며 결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온건파들은 "그래도 어렵게 성사시킨 합동위령제를 포기할 경우 도민 여론이 어떻게 되겠느냐"면서 인내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결국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가 그 다음해인 1995년부터 별도의 4·3 추모행사를 갖는 등 공준위 내부는 균열되고 말았다.

한편 1994년 2월 발족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제주도지회는 합동위령제와는 별도로 그해 4월 '4·3 문화예술제'를 개최하였다. 반공 색채가 짙은 유족회에서 4·3 문화행사를 탐탁해 하지 않자 아예 위령제와 별개로 독립적인 4·3 문화운동을 벌여나간 것이다.

☞다음회는 '제주도의회 4·3특위' 제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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