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53> 제주도의회 4·3특위 ③

   
 
  1993년 11월 3일 제주도의회의 청원서가 국회의장에게 전달되고 있다. 왼쪽부터 고석현·양금석·김영훈 도의원과 이만섭 국회의장, 양정규 국회의원, 강완철·이재현 도의원.  
 

대학생들도 1만 7000명 서명 청원서 전달
국회의원들 "4·3이 뭐냐"…피해조사 절감

제주도의회 4·3특위 ③

   
 
  1994년 2월 7일 제주도의회 정문에서 열린 '4·3피해신고실' 현판식. 왼쪽부터 김영훈 위원장, 김병언 4·3유족회장, 장정언 의장, 신구범 지사, 양정규·현경대 국회의원.  
 

1993년 3월 발족한 제주도의회 4·3특위는 4·3의 역사적 진상규명과 도민 명예회복을 위한 3단계 활동계획을 수립하였다. 1단계는 기초조사 단계로 자료 수집, 희생자 신고 창구 설치, 각 마을별 4·3희생자 조사 등을, 2단계에서는 기초조사를 바탕으로 전문기관에 용역조사를 의뢰하여 4·3의 역사를 정립한 후, 3단계에서는 도민 화합방안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추진하는데 도의회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4·3특위는 제주출신 국회의원과 기초의회까지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993년 6월 29일 제주출신 변정일·양정규·현경대 국회의원과 도의회 4·3특위 위원, 기초의회 의장단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연석회의는 4·3문제 해법을 찾는 첫 공식 회동이란데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회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4·3해법에 있어 궁극적으론 국회와 정부 차원에서 풀어야 한다는데 공감하면서도 방법론에는 의견 차이를 보였다. 도의원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참석자 중심으로 공동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2명의 국회의원은 먼저 도의회 특위 활동을 한 후 나중에 논의하자는 태도였다. 특히 모 국회의원은 시큰둥한 답변으로 참석자들을 실망시켰다.

이런 대화록은 다음날인 6월 30일자 「제민일보」에 고스란히 실렸다. 곧바로 4·3연구소 등에서는 모 의원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당황한 해당 의원 측은 본의가 잘못 알려졌다면서 해명하기에 급급하였다. 결과론이지만 그것은 일종의 예방주사가 되었다. 그 후로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4·3에 임하는 자세가 한결 달라졌기 때문이다.

도의회 4·3특위는 4·3과 비슷한 대만 2·28사건 해결의 지혜를 얻기 위하여 1993년 8월 26일부터 이틀간 대만을 방문했다. 이 방문의 이면에는 함께 동행한 변정일 국회의원의 숨은 역할이 있었다. 그곳에서 대만 정부와 입법원(국회)이 46년전(1947년)에 발생한 2·28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2·28사건처리법' 등 3개 법률을 제정한 것을 알게 됐다. 도의회 4·3특위는 대만 현지에서 긴급 간담회를 개최하여 국회에 4·3관련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제주도의회는 1993년 10월 28일 국회 4·3특별위원회 구성에 관한 청원서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청원서는 "4·3이 제주만의 지엽적 문제가 아닌 해방공간에서의 모순 구조에 의해 발생된 만큼 진상규명·명예회복을 위해서는 국회·정부의 해결 노력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이에 따라 청원서를 제출한다고 밝혔다. 이 청원서는 11월 3일 도의회 4·3특위 위원들이 국회를 방문, 이만섭 국회의장에게 직접 전달하였다.

한편 10월 28일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제총협·의장 오영훈)는 1만7850명의 서명을 받은 연명서를 붙여서 국회에 4·3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 요구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제주도내 4개 대학에서 대학생과 도민들을 대상으로 가두 서명운동을 벌인 결과였다. 이 청원서는 민자당 양정규·현경대 의원, 민주당 유인태·정상용 의원, 무소속 변정일 의원 등 5명의 의원 소개로 제출되었다. 그동안 운동권 차원에서 4·3에 접근하던 대학가에서 4·3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중앙정치권을 움직여야 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뤄진 결과였다.

이때부터 제주4·3문제가 국회 차원에서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상당수 국회의원들은 "도대체 4·3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어왔다. 도의원들이 피해상황을 설명하려 해도 마땅한 물증자료가 없었다. 피해조사가 시급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된 것이다.

1994년 2월 7일 도의회 '4·3피해신고실'이 개설되었다. 이날 도의회 정문에서는 신구범 도지사, 도의회 장정언 의장과 김영훈 4·3특위 위원장, 양정규·현경대 국회의원, 김병언 유족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피해신고실 현판식도 열렸다. 4월 1일에는 마을별 피해실태를 조사하는 17명의 조사요원이 위촉되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제주도의회는 1995년 5월 1만4125명의 희생자 명단이 실린 「제주도4·3피해조사 1차보고서」를 발간하였다. 1997년 1월에는 1만4500여명의 명단이 게재된 피해조사보고서 수정·보완판도 편찬하였다. 이 보고서를 통해서 열 살 미만의 어린이, 환갑을 넘긴 노인 등 그동안 풍문으로만 나돌던 희생자들의 면면이 드러났다.

☞ 다음회는 '국회 4·3조사보고서 발굴'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