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54> 국회 4·3조사보고서' 발굴

증언 청취 속기록, 학살 신고서 기록 남겨
5·16후 진상규명 중단돼…30년 만에 발굴

'국회 4·3조사보고서' 발굴

   
 
  제주4·3평화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1960년 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보고서  
 

1993년 10월 당시 국회 법사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제주 출신 현경대 의원이 1960년 민주당 정권 시절의 국회 4·3조사활동보고서를 입수해 발표하였다. 현 의원이 국회도서관 서고에서 발견한 이 보고서는 4·3관련 증언청취 내용을 담은 국회조사단의 속기록과 조사활동 보고서, 피해자 가족에 의해서 신고 접수된 희생자 1917명에 대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 등이었다.

현 의원은 그해 6월 제주도의회 4·3특위 등과의 간담회 때 4·3해법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가 언론과 4·3단체로부터 비난을 받았던 당사자 중 한 사람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본의가 잘못 알려졌다고 해명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던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회 4·3조사보고서 발굴이란 '대어'를 낚은 것이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 바람이 전국적으로 불었다. 이런 열기를 타고 '양민학살' 사건 등에 대한 진상규명 운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국회는 그해 5월 23일 한국전쟁 당시 거창·함양에서 국군에 의해 자행된 이른바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에 대한 조사단을 구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제주도민 사이에서는 "불과 몇백명이 죽은 지역도 조사하는데 수만명이 희생된 제주 지역을 조사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비난여론이 높았다. 이처럼 진상규명 촉구 분위기가 거세지자 제주 출신 국회의원 김두진·고담용·현오봉 의원 등이 나서서 조사대상 지역에 제주를 포함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그해 6월 6일 하루 동안 경남반(慶南班)이 제주에 들어와 조사하기로 국회의 승인이 났다.

이때부터 제주사회는 매우 긴박하게 움직였다. 국회 조사단이 내도하기까지 남은 시일은 불과 닷새뿐이었다. 지방지인 「제주신보」는 급히 사고(社告)를 내고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를 받기 시작하였다. 제주도내 시·군 의회에서는 출신 의원 선거구별로 각각 진상 조사하기로 긴급 결의하여 활동에 나섰다.

   
 
  제주신보사가 접수한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  
 
하지만 국회 경남조사반(최천·조일재·박상길 의원)에 곁다리로 낀데다 6월 6일 오전 11시 55분부터 오후 3시 15분까지 불과 3시간 남짓 벌인 조사활동으로는 엄청난 희생을 치른 4·3의 본질을 꿰뚫을 수가 없었다. 또 아이러니컬하게도 최천 조사단장은 4·3 당시 제주도경찰감찰청장으로 재직했던 4·3 진압 당사자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제주 조사 활동에서도 증언자를 마치 죄인 다루듯 강압적으로 대하다가 거센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이같은 국회 조사단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들은 짧은 기간 안에 1917명의 희생자 명단을 제출하고 본격적인 진상조사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발생한 5·16 군사쿠데타는 4·3진상규명 활동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 후 4·3이 다시 지상으로 나오기까지 실로 30년의 세월이 걸렸다. 이 국회 조사보고서는 4·3 진상규명과 중앙정치권의 민주화 수준이 직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본과 같다. 4·3의 전개과정이 현대사의 질곡과 바로 맞물려 있는 것처럼 그 진상규명 역사 또한 한국현대사의 빛과 어둠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에 군사정권이 아닌, 민주정부가 지속되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의 세월, 인고의 시간들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란 가정은 쉽게 할 수 있다.

「제민일보」 '4·3취재반'은 1995년 「4·3은 말한다」 제3권을 출판할 때 1960년의 국회 4·3조사보고서를 부록으로 실었다. 국회조사단 활동 속기록과 희생자별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 내용 이외에도 4·3취재반이 발췌한 국회조사단 활동 신문자료 등을 게재했다.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에는 희생자 개개인에 대한 인적사항 이외에도 학살 일시, 장소, 상황 등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접수 기간이 짧아 전체 희생자의 10%에도 못 미쳤지만, 신고서 양식에 따라 써내려간 사연들은 눈물겨웠다. 아니 처절함 그 자체였다.

「4·3은 말한다」 제3권은 일본어판으로도 출간되었다. 일본어 번역을 맡았던 재일 한국인 소설가 김중명은 번역 과정에서 느꼈던 소회를 '역자(譯者)의 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권말 부록의 양민학살 진상규명 신고서의 번역은 고통스러웠다. 단순한 작업의 반복으로 지루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전체 희생자의 1할에 못미치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빼앗긴 허다한 목숨들의 무게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을 무겁게 했기 때문이다. 90세를 넘는 노인도 있는가 하면, 16세, 17세의 소녀도 있다. 심지어는 태어나서 얼마 안 되는 갓난아이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를 앞에 두고서는 할 말을 잃어버린다"

☞ 다음회는 '정치권의 4·3 진실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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