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55> 정치권의 4·3 진실찾기

 "억울함 풀겠다" 4·3특별법 제정 등 약속
  이후 선거마다 제주에선 '4·3공약' 쏟아져

정치권의 4·3 진실찾기

1994년 2월 2일 변정일 의원이 국회의원 75명의 서명을 받아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 4·3특위 구성 결의안을 발의하는 모습을 보도한 기사.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이 계속되면서 4·3 진상규명 활동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하지만 1987년 6월 항쟁 이후 4·3문제도 서서히 꿈틀대기 시작하였다. 이와 맞물려 정치권에서도 4·3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첫 발언은 제13대 대통령선거전이 한창이던 1987년 11월 30일 제주유세에 나섰던 김대중 후보(평민당)의 입에서 나왔다.

"제주도민은 4·3의 비극을 겪었다. 나는 제주인의 한과 고통과 희망을 함께 하겠다. 나도 용공조작 피해자의 한사람이다. 내가 집권하면 억울하게 공산당으로 몰린 사건 등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억울한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 주겠다"

이 발언은 정치권에서 처음으로 4·3을 문제화한 것으로, 이후 대선과 총선은 물론 지방선거 때마다 제주지역에서는 4·3 공약이 단골 이슈가 되었다. 제14대 대선에도 출마한 김대중 후보(민주당)는 1992년 12월 11일 제주 유세 때 국회 4·3특위 구성과 4·3특별법 제정, 특별법을 토대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위령사업과 보상 등 4·3 공약을 구체적으로 내걸었다. 김대중 후보의 지속적인 4·3 공약은 그가 1997년 제15대 대선(국민회의 후보)에서 승리함으로써 하나씩 실천의 길을 걷게 된다.

1989년 4월 1일 제주시민회관에서는 '4·3 설문조사 보고대회'란 이색적인 행사가 열렸다. 제주출신 강보성 의원(민주당)이 이사장으로 있던 제주도문제연구소가 주최한 행사였다. 그해 창립된 제주도문제연구소는 첫 사업으로 도민 1200명을 대상으로 4·3 관련 설문조사를 벌였는데, 응답자의 74%가 4·3사건의 진상조사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제주도문제연구소는 그 이후 「제주인」이란 월간잡지를 창간, 4·3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1989년 9월 24일 국회 내무위원회의 제주도 국정감사에서도 4·3이 집중 거론되었다. 최기선 의원(민주당)이 4·3 희생자 유족인 이상하(서귀포시 회수동)를 증인으로, 4·3 피해현장을 조사해온 소설가 오성찬을 참고인으로 채택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 채택 여부를 둘러싸고 여야 의원끼리 새벽까지 장시간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기립 표결 끝에 증인은 채택되고, 참고인 채택은 부결되었다. 경찰 등에 의해 가족 8명이 희생된 이상하는 담담하게 그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였다. 여당 의원들은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 바로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4·3의 참상이고, 진상규명을 하면 할수록 4·3의 실체가 속속 드러났다.

그해 국회 농수산위원회의 제주도 국정감사에서도 강보성 의원은 4·3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이군보 도지사는 "4·3의 올바른 조명을 위해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 이를 정립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처럼 산발적으로 쏟아지던 정치권의 4·3에 대한 관심은 1990년 1월 민정·민주·공화당이 합당을 발표하면서 일시에 조용해졌다.

1993년에 이르러 다시 국회 차원에서 4·3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해 5월 8일 이영권 의원(민주당)이 4·3 규명을 위해서 진상규명조사특위 구성을 촉구하였고, 여당 쪽에서도 김종하 의원(민자당)이 제주4·3 등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황인성 국무총리는 "국회나 권위있는 단체가 진상조사에 나설 경우 협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답변하였다.

이 무렵 제주도의회와 제주지역총학생협의회가 국회 4·3특별위원회 구성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한데 이어 이번에는 국회의원에 의해 이런 안이 정식의안으로 발의되었다. 즉 제주출신 변정일 의원(무소속)은 1994년 2월 2일 여·야 국회의원 75명의 서명을 받아 '제주도4·3사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는데, 우리 헌정 사상 4·3에 관한 첫 국회 발의로 기록되었다. 변 의원은 그해 7월 8일 국회 본회의에서 대정부 질의를 통해서 정부차원의 진상규명과 사과 용의를 질의하는 등 그 무렵 가장 활발하게 4·3 진상규명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의 이런 촉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원론적인 답변만 되풀이하였다. 변 의원의 질의에 대해 당시 이영덕 국무총리는 "국회나 사회단체, 또는 학계에서 진상규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정부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질 경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나마 문민정부 들어 종래 군사정부 시절의 4·3 금기시 시책이 완화되었지만, 정부에 대한 4·3 진실규명 촉구는 쇠귀에 경 읽는 격이었다.

한편 1995년 부활된 민선도지사 선거에서도 4·3문제 해결이 주요 공약으로 등장하였다. 당선된 신구범 도지사는 중앙정부에 대해 4·3 진상규명과 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에 이른다.

☞ 다음회는 '한국기자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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