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60> '대만2·28사건' 취재기 ①

대만2·28사건의 잔혹한 진압을 그림으로 묘사한 역사화.

'대만정부 보상금 지급' 계기로 심층취재
"공산반란" 왜곡… 진실규명 과정도 비슷

'대만2·28사건' 취재기 ①

「제민일보」 1993년 4월 24일자에 보도된 필자의 칼럼기사

1993년 4월 21일자 「제민일보」에는 "4·3과 흡사한 대만2·28사건/46년만에 보상금 152억 지급 결정"이라는 박스 기사가 실렸다. 로이터통신이 대만의 언론보도를 인용해 타전해온 짤막한 기사를 토대로 김종민 기자가 내용을 보충해 보도한 기사였다. 그러자 예사롭지 않은 반응들이 나타났다. 대만2·28사건의 실체는 무엇이며, 대만2·28사건이 제주4·3과 닮은 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보상까지 받게 됐는가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신문사에 문의전화도 잇따랐다.

필자는 2·28사건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자 보충취재를 하여 4월 24일자에 "제주4·3과 대만2·28"이란 칼럼기사를 통해 2·28사건을 소개했다. 그리고 중국 현대사 전문가를 수소문하던 중에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꼽히는 리영희 교수(한양대)가 이 분야에 해박하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원고를 청탁했다. 그래서 「제민일보」 창간 기념일인 6월 2일자에 "대만2·28대학살 진상-제주도 4·3의 거울"이라는 제하의 리 교수의 특별기고를 싣게 되었다(리영희 교수와의 만남은 다음에 자세히 다루겠다).

그렇다면 대만2·28사건은 무엇인가. 이 사건은 1947년 2월 27일 시작되었다. 194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난 대만은 당시 중국 본토의 국민당 정권의 통치아래 있었는데, 타이페이시에서 담배를 몰래 팔던 여인을 본토 출신의 전매청 관리와 사복경찰보조원들이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대만인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경찰이 발포, 학생 한명이 사망했다. 그 다음날인 2월 28일 대만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시위대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일부 관공서 건물이 불탔다. 이에 맞서 정부군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사상자가 또다시 발생하였다.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다. 시위대는 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였다. 이에 당황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3월 8일 본토에서 2개 사단의 군대를 파견하고 3월 10일 계엄령을 선포,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무고한 사람 수만이 학살되었다.

그러면 무엇이 제주4·3과 흡사한가. 첫째는 두 사건 모두 경찰의 무분별한 발포에서 촉발되었고, 누적된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했다는 점이다. 그 배경에는 섬 주민과 본토 출신 사이의 갈등이 깊게 깔려 있었다. 둘째는 이렇게 섬 주민들의 사회·경제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시작되었지만 대만에서는 자치권의 요구로, 제주에서는 자주통일정부 지향이란 정치상황으로 변전되어 갔다는 점이다. 셋째는 본토에서 파견된 진압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토벌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재판절차 없이 처형된 점도 닮은꼴이다. 넷째는 진압당국이 이 사건을 "공산당의 배후조정에 의해 일어난 반란"으로 규정하고 40년 가까이 금기시해왔다는 점도 같았다.

대만에서도 1987년 계엄령이 해제되기 전까지는 2·28사건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였다. 대만은 장제스 총통에 이어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 총통이 장기 집권하면서 독재정권체제가 오래 지속되었다. 이 부자정권은 '반공'을 앞세워 38년간이나 계엄령을 선포한 상태에서 정권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철권정치도 1988년 1월 장징궈 총통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렸다. 대만에 민주화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상황과도 비슷하였다. 30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군사정권도 1987년 6월 항쟁으로 무너지는 틈새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국사회에도 대만 못지않은 거센 민주화바람이 불었다. 다만 대만에서는 빠른 걸음으로 2·28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기념사업, 희생자 보상까지 다다른 반면, 한국에선 4·3와 같은 과거사 복원작업이 매우 더디게 진전되었다. 야권의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권' 출범이 그걸 의미하고 있었다.

대만은 장징궈의 사망 이후 리덩후이(李登輝)가 정권을 잡았다. 그 역시 보수당인 국민당 소속이었지만, 총통 자리에 오른 첫 대만출신인 점이 달랐다. 그렇지만 리덩후이도 집권 초기에는 조심스런 행보를 하였다. 그는 2·28사건에 대한 진상조사 요구가 빗발치자 1988년 2월 "앞을 바라봐야지 뒤를 돌아봐선 안된다. 역사학자의 손에 맡겨야 한다"며 슬쩍 발을 빼려 했다. 마치 한국에서 '4·3을 역사에 맡기자'는 것과 너무 흡사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물꼬를 쉽게 막을 수 없듯이 진실 규명을 향한 대만인의 욕구를 리덩후이 총통도 막을 수 없었다. 2·28사건에 대한 대만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는 이런 진통을 거쳐 시작되었다.

☞다음회는 '대만2·28사건 취재기'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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