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62> 리영희 선생과의 만남

리영희 선생이 필자에게 보낸 엽서들. 뇌출혈로 쓰러진 후 힘겹게 쓴 글자 자체가 큰 감동을 주었다.

  4·3 진실규명에 유다른 관심과 성원 보내
"'4·3은 말한다' 눈물로 읽는다" 토로하기도

'우리 시대의 스승'이란 리영희 선생의 생전 모습
리영희 선생과의 만남
리영희(李泳禧) 선생은 한국 진보진영의 대부로 꼽힌다. 2010년 그가 눈을 감았을 때 한국 언론은 '우리 시대의 스승', '실천적 지식인의 표상', '큰 언론인'이라는 별칭을 붙여 주었다. 프랑스 유력일간지 「르몽드」는 이미 그를 '사상의 은사'라 호칭했다.

그의 평생은 '반지성에 맞선 치열한 싸움의 역정'이었다. 근무하던 언론사와 대학에서 각각 두번씩 해직되었고,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되었다. 그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1974), 「8억인과의 대화」(1974), 「우상과 이성」(1977)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가린 베트남 전쟁의 실체와 중국의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내며 당대의 대표적 금서로 탄압받았다. 하지만 1970~80년대 대학가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대학생과 지식인들로부터 인기를 끌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라는 책 제목처럼 그는 반공주의의 허상을 깨뜨리고 오로지 진실과 균형의 날개로 이념적 도그마에 저항했다.

리영희 선생과 4·3취재반과의 첫 인연은 1989년 제주신문에 연재했던 '4·3의 증언'이 월간지 「사회와 사상」에 전재되었을 때였다. 「사회와 사상」 편집위원이었던 그는 지방신문에 연재되는 4·3기획물을 전국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 월간지에 그대로 싣도록 적극 추천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사실을 그때는 몰랐고, 나중에야 알았다.

두번째의 인연은 1993년 대만 2·28사건에 관한 원고를 청탁하면서였다. 중국 현대사에 박식하고 균형있는 시각으로 글을 써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리영희 선생에게 원고를 써달라고 부탁드렸던 것이다. 당시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였던 그는 기꺼이 이 청탁을 수락했다. "대만2·28 대학살 진상-제주도4·3의 거울(鏡)"이란 제목의 이 원고는 「제민일보」 1993년 6월 2일자 창간기념 특집호에 실렸다. 1만자에 가까운 장문으로 2면을 빼곡히 채웠다.

사건의 배경과 국민당정부의 학살과 은폐, 진실규명 과정 등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대만 원주민이 50년간 섬긴 일본 식민경찰과 군대는 거칠었지만 규율이 엄했다. 그러나 새로 나타난 '동포정권'인 국민당정권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규율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집단이었다. 대만인들의 원한은 안으로 안으로 곪아 들어갔다. 조그마한 계기가 있으면 거대한 불을 뿜을 모든 조건이 갖춰진 상태였다"는 글이 인상적이었다. 이 원고는 김종민 기자의 "대만2·28 50돌 현지취재기"와 함께 「4·3은 말한다」 제4권에 부록으로 실렸다.

이런 인연으로 리영희 선생과는 자주 연락하는 사이가 되었다. 선생은 특히 한국전쟁 발발직후 통역장교로 복무할 때, 제주4·3 학살에 관여된 제9연대에 근무한 경력이 있다면서 괴로워하기도 하였다. 그는 「4·3은 말한다」 제4권에 실린 추천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1948년 제주도 민간토벌 명령을 거부하고 병란을 일으킨 경비대 제14연대를 우연히 대학생으로서 '여순반란'의 전화 속에서 만났고, 제주도에서의 악명을 지닌 채 개편된 국군보병 제9연대의 일원으로서 6·25 민족상잔의 전쟁터를 가로질러 살아온 사람이다. 따라서 제주4·3사건은 나의 청년기의 일부를 이룬다. 그러기에 나는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를 눈물로 읽는다"

리영희 선생은 제주4·3특별법 국회통과를 누구보다 기뻐했다. 2000년 1월 7일 보내온 엽서에는 "20세기에 저질러진 이 나라의 가장 흉악한 대학살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작은 노력인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이 20세기가 저무는 날에 늦게나마 성사된 것을 함께 축하한다"고 써 있었다.

그런데 선생은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이 마비되었다. 그런 그가 2001년 8월 다시 엽서를 보내왔다. "우반신 마비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겨우 팔과 손이 조금 움직여 연말인사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면서 "4·3 일을 맡게 된 것을 축하하고, 역사적 사명감을 가지고 큰일을 완주해 달라"는 요지의 글이었다. 얼마나 힘들게 쓴 글인지 그 자체가 감동이었다. 「리영희 평전」의 저자인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은 병중에 쓴 그의 글체를 '리영희 떨림체'라고 표현했다.

리영희 선생은 2010년 12월 5일 별세했다. 그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엄수되었다. 전국에서 500여명의 장례위원이 꾸려졌는데, 필자도 말석에 끼어 그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배웅하였다. 그는 광주 5·18묘역에 영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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