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64>4·3에 대한 외신보도

'20세기 특이한 100대 사건'에 4·3 선정
"엄청난 학살, 전모 묻혀 있는게 더 특이"

4·3에 대한 외신보도

1992년 일본의 최대 신문사인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이 제주4·3을 집중 보도하였다. 요미우리신문은 일본에서 「아사히신문」과 쌍벽을 이루는 신문이지만, 발행부수는 1000만부를 넘어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아사히신문이 진보적인 신문이라면, 요미우리신문은 보수적 성향을 띠고 있다. 그런 신문이 외신으로는 처음 4·3을 집중 조명한 것이다.

▲ 1992년 다랑쉬굴 유골 발굴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는 일본 요미우리신문 4·3 특집기사.
요미우리신문은 1991년부터 '현대사 재방(再訪)'이란 특집을 보도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100년 동안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100대 특이한 사건'을 테마로 심층 조명하는 기획물이었다. 이미 '케네디 암살' '쿠바 위기' '헝가리 봉기' '베를린 장벽 붕괴' '중국 천안문 사건' '소련연방의 붕괴' 등 세계적인 이슈를 모았던 사건들이 보도되었다. 한반도 사건으로는 '한국전쟁 개전의 날' '4·19혁명' 등이 포함되었는데, 그 반열에 '제주4·3'도 끼게 된 것이다.

1992년 5월 이 기획물을 취재하기 위해 요미우리신문 기무라 고조(木村晃三) 편집위원이 제주에 왔다. 그는 1975년부터 3년간 서울특파원을 지냈고, 그 이후 모스크바 특파원 등 세계를 누비며 다녔던 50대 후반의 베테랑 언론인이었다. 필자는 그가 제민일보를 찾아 왔을 때, "어떻게 세계적인 사건의 대열 속에 제주4·3을 선정하게 됐는가?"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첫째는 제주도와 같은 좁은 공간에서 민간인 수만명이 학살된 것이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토록 엄청난 사건이 한국 안에서조차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채 묻혀 있다는 사실을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제주4·3은 마치 대나무의 마디와 같이 세계 현대사의 중요한 고비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 요미우리신문 발간 「20세기의 드라마-현대사 재방」 표지.
그 무렵 제주에서는 때마침 '다랑쉬굴' 유해가 발견되어 그 장례문제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장례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당초 여정보다 며칠 더 머물렀다. 필자는 4·3 특집을 보도한 요미우리신문을 직접 보지 못하였다. 다만 그해 10월 요미우리신문사에서 연재물을 모아 발간한 「20세기의 드라마-현대사 재방」이란 책을 받아보고서야 많은 지면이 할애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4·3 특집은 '제주도(濟州島)사건'이란 타이틀 아래 보도되었다. "동포 서로 죽여-데모 발포가 서장(序章)이었다"란 소제목을 단 기사는 다랑쉬굴 유골 장례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44년만에 발견된 11구의 유골, 당초 오전 7시 장례 예정이었는데 앞당겨 치르는 바람에 기자들도 취재못했다면서 관계자들이 왜 이런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는지 강한 의문을 제기한다.

기사는 4·3의 발단이 1947년 3월 1일 데모대에 대한 경찰의 발포부터 시작된다고 밝히면서, 그 이전에 흉작과 미군정의 미곡정책 실패, 6만명에 이르는 귀환인구의 실직난 등 경제적 불만이 누적되었음도 지적했다. 요미우리 기사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은 종전 후에도 제주도에는 「개조(改造)」(일본의 진보적 종합잡지) 정기 구독자가 200명에 이를 정도로 유식자가 많았다는 내용이다. 박경훈 도지사가 3·1발포 직후 인책 사임한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에 취임한 사실은 당시의 '열기'를 짐작케 한다는 표현도 썼다.

중앙에서 제주도를 '빨갱이섬'으로 인식해서 응원경찰과 우익청년단체의 파견, 남로당 제주도당의 자위대 조직, 1948년 4월 3일 봉기, 단독선거 반대,  본격적인 진압작전으로 비극이 깊어갔다고 기술하였다. 요미우리 기사는 "극비의 교섭 결렬-이제 되돌아 갈 수 없다"란 또 다른 소제목이 풍겨주듯 해결의 찬스가 있었는데, 그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또한 김달삼이 해주대회에 참석한 것을 비판, "중대한 시기에 (게릴라) 지도부가 제주를 떠난 것은 '전선 이탈'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요미우리는 2개의 박스기사를 별도로 취급했는데, 하나는 '8000명에서 8만명의 엇갈리는 사망자 숫자', 다른 하나는 '남로당 지령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논쟁과 관련해서 연구자들의 의견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요미우리 기사는 "'폭동'으로 불리던 1980년 광주사건도 재평가되었다"면서 "4·3사건에 대한 재평가는 중앙의 민주화, 정보공개의 수준과 연동되는 문제"라고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한겨레신문을 제외한 우리나라 중앙언론이 4·3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 때, 일본 유수 신문이 4·3을 집중 조명한 것이다. 그런데 몇년 후 요미우리신문에 이어 이번에는 아사히신문에서 4·3취재반을 찾아왔다. 

☞다음회는 '4·3취재반 외신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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