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65> 4·3취재반 외신보도

"4·3 심층 추적한 대형연재 매우 인상적"
 궁극적 목표는 "정부 사과에 있다" 밝혀

제민일보 4·3취재반의 활동상을 국제면 톱기사로 보도한 아사히신문 1997년 4월 2일자 기사
4·3취재반 외신보도
1997년 4월 2일 일본의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국제면 톱기사로 제민일보 4·3취재반의 활동상을 보도했다. 아사히신문은 당시 발행부수만도 800만부가 넘는 일본의 대표적인 일간지 중 하나이다. 이렇게 권위있는 신문이 외국의 작은 신문사 기자들의 활동상을 특집으로 소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도쿄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유학생 강창일(현 국회의원)이 그날 아사히신문을 보고 "너무 반가웠다"면서 기사 전문을 팩스로 보내주었다.

그 며칠 전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우에무라(植村 隆) 기자가 제민일보를 찾아왔다. 그는 4·3취재반의 활동상을 취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4·3사건 자체가 특이한데다, 그 사건을 심층적으로 추적해서 주 2회씩 '대형연재'하는 취재반의 활동이 매우 인상적이다"고 표현했다. 「4·3은 말한다」 일본어판은 도쿄 신간사에 의해 1996년까지 모두 3권이 발행되고 있었다. 여기에다 김석범 선생의 장편소설 「화산도」 발행 등으로 일본 지식인 사회에 제주4·3의 실체가 점차 알려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를 눈여겨본 아사히신문이 4·3취재반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4·3취재반 특집기사의 주 제목은 "49년 전의 도민학살사건 진상추적 연재 366회"였다. 그 때까지 연재된 횟수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부 제목은 "한국 제주도의 작은 신문이 체험자 5000명을 취재"했고, "목표는 500회, 정부의 사죄를 받는 것"이라고 달았다.

이 기사는 "미군정하의 남한 단독선거 실시에 반대, 1948년 4월 3일 제주도민이 무장봉기해 다수의 주민이 학살당했던 4·3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지역신문인 「제민일보」 취재반은 10여년간 추적을 계속해왔다. 지금까지 약 5000인의 체험자들을 취재했던 주 2회의 대형연재 '4·3은 말한다'는 그 연재횟수가 366회를 넘어섰다. '공산주의자의 폭동'이라고 단정지어진 채 오랫동안 터부시되어 왔던 이 사건의 진실이 조금씩 밝혀지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시작되었다.

기사는 이어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이 사건의 취재가 불가능하였지만 한국 민주화의 흐름 속에서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이 결성되었던 일, 제주신문의 노동쟁의로 4·3취재반을 비롯한 기자 대부분이 해고되었고, 그 기자들이 퇴직금을 모아 제민일보를 창간해 4·3기획물 연재를 계속하게 됐던 일, 광주 청문회가 침묵했던 4·3체험자들의 입을 열게 하는 촉진제가 되었던 일 등이 소개되었다. 아사히신문 기사는 "(1997년) 4월 1일자 제민일보는 '사건 당시 제주도에 내려졌던 계엄령은 불법이었다'고 보도했다"는 사실도 밝혔다. 아울러 4·3취재반이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사실과 연재물이 한국에서는 4권, 일본에서는 3권이 출판된 사실, 그리고 최종적인 연재의 목표는 500회라고 보도하였다.

이 특집기사에는 4·3취재반원인 김애자 기자의 "울면서 증언하는 노인들도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령의 체험자들은 하나 둘 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취재를 하는 일은 그 노인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기도 하다"는 인터뷰 기사도 실렸다.

4·3취재반장인 필자의 인터뷰 내용 가운데는 세 꼭지가 보도되었다. 첫 번째는 4·3취재반의 결성 과정과 입이 무거웠던 체험자들의 입을 열게 된 계기, 두 번째는 사건의 발발 성격이었는데, "사건은 본토에서 온 경찰과 우익집단과 그들에 대립한 제주도 일부 청년들과의 충돌에서 발단되었고, 그 항쟁 중에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슬로건이 내세워졌다"고 보도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앞으로의 계획인데, "대만에서 1947년에 발생했던 2·28사건은 이미 대만정부의 사죄와 진상규명이 실현되었다. 한국정부는 4·3진상을 규명하고 피해자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 사실이 기사화되었다.

필자를 비롯한 4·3취재반은 그 무렵 제주4·3의 궁극적 문제 해결은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국가의 사과라고 그 목표를 뚜렷하게 세우고 있었다. 이 사건의 심층을 들여다보면서, 또한 유족들이 한결같이 청원하는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도 그 방안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취재반의 활동도 그 목표를 향한 '하나의 여정'이라는 입장 정리와 다짐을 했던 것이다. 그런 속마음이 아사히신문이란 외신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다음회는 '초토화참상 연재 경위'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