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66> 초토화 참상 연재 경위

교래리 시작으로 3년 동안 한바퀴 돌아
초토화 작전의 허구와 실상 속속 드러나

초토화 참상 연재 경위
제민일보 연재물 '4·3은 말한다'는 1996년 10월에 340회를 넘기면서 대규모 유혈사태를 몰고 온 초토화 작전의 실체와 그 참상을 다루게 되었다. 광란의 한복판에 들어선 것이다. 본격적인 초토화 상황을 다루기 전에 초토화 직전의 상황, 즉 '9연대 강경토벌전 채택', '여순사건 이후 공방전', '제주읍에 불어닥친 광풍', '유혈사태의 길목' 등을 보도했다.

필자는 이 무렵 초토화 상황의 취재 방향을 놓고 고심에 빠졌다. 초토화 피해가 컸던 몇몇 마을을 선정하여 상징적으로 다뤄야 할지, 전수조사하여 제주도 전체 마을의 피해상황을 두루 보여줘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김종민 기자 등은 초토화 작전 기간에 전도에 걸쳐 워낙 많은 사건이 동시에 벌어졌기 때문에 초토화의 실상을 제대로 파헤치기 위해선 전수조사가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이 취재안은 초토화 작전의 실상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는 반면, 연재가 장기화되는 부담이 있었다. 4·3취재반은 당초 6명에서 3명(양조훈, 김종민, 김애자)으로 재편되어 있는데다, 필자가 그해 8월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현장 취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2명의 기자가 이 일을 감당해야만 했다.

또 다른 이유는 경영주와의 관계였다. 제민일보는 1990년 사원주와 도민주 22억5000만원을 모아 창간되었지만, 지속적인 경영 안정을 이유로 대주주를 영입했다. 그런데 1995년 대주주의 개인 회사가 부도나면서 오히려 신문사마저 위기에 빠졌다.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재일동포인 새 경영주를 맞게 되었는데, 그 경영주가 필자에게 "4·3연재를 언제까지 할 것이냐?"고 물어왔다. 공안정보기관의 입김이 작동되고 있음이 감지되었다.

연재를 빨리 끝내라는 안팎의 압력에다가 2명의 기자가 전수조사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은 전수조사안을 채택하였다. 압력에 굴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싫었지만, 그것보다는 그때까지 밝혀지지 않은 마을마다의 초토화 실상을 이때가 아니면 밝히기 어렵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96년 10월부터 '초토화 작전의 배경'이 10회나 심층적으로 연재되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4·3 전개 과정에서 가장 참혹하고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인 초토화 작전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 정권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 제주도와 국내 상황만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전략을 깊게 분석했다. '불법 계엄령' 문제도 집중적으로 해부하였다. 이런 토대 아래 초토화 작전이 제주도 전체 마을에 어떤 참상을 입혔는지 추적하였다.

마을 취재는 조천면을 시작으로 시계 방향에 따라 제주도를 한바퀴 돌아 제주읍까지 오는 형식이었다. 첫 마을은 1996년 11월 26일자에 보도된 조천면 교래리였다('4·3은 말한다' 352회). 1948년 11월 13일 새벽 토벌대의 급습을 받은 이 마을은 100여 가호가 모두 불탔고, 노약자 대부분이 희생되었다. 김인생의 경우 가족과 친척 등 14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양복천 할머니의 다음과 같은 절규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설마 아녀자와 어린아이까지 죽이겠느냐'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집에 불을 붙이는 군인들 태도가 심상치 않았어요. 무조건 살려달라고 빌었지요. 그 순간 총알이 내 옆구리를 뚫었습니다. 세살 난 딸을 업은 채로 픽 쓰러지자 아홉살 난 아들이 '어머니!'하며 내게 달려들었어요. 그러자 군인들은 아들을 향해 또 한 발을 쏘았습니다. '이 새끼는 아직 안 죽었네!'하며 다시 아들을 쏘던 군인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아들은 가슴을 정통으로 맞아 심장이 다 나왔어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양 할머니의 옆구리를 관통한 총알은 등 뒤에 업혔던 딸의 왼쪽 다리까지 부숴 놓았다. 양 할머니는 딸이 두 번째 생일날 불구가 되었다면서 "어느 세상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비탄의 목소리는 도내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마을 취재는 초토화 작전의 실상과 그 허구성, 그리고 참상을 속속들이 드러나게 하였다. 법을 지켜야할 공권력이 무수히 불법으로 집행되어 민간인을 학살하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진 것이다.

초토화 작전 마을별 참상 보도는 1999년 8월 20일자 '제주읍 용강리-월평리'상황('4·3은 말한다' 455회)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아니, '4·3은 말한다' 연재 자체가 경영주의 입김으로 중단되는 사태를 맞게 되었다. 그리고 필자 또한 신문사를 떠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다음회는 '불법계엄령 보도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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