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71>4·3 50주년 일본 행사

도쿄 강연서 주장…실제적·법적 책임 강조
오사카에서 처음 열린 진혼굿은 울음바다

4·3 50주년 일본 행사


제주4·3 50주년을 맞아 희생자를 위령하고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는 각종 행사가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도 열렸다. 1988년 도쿄에서 결성된 '제주도4·3사건을생각하는모임' 회원이 중심이 되어 1997년 '제주도4·3사건50주년기념사업실행위원회'(공동대표 김석범·이철·현광수·김민주·김병도·김일·안수영·한태숙·이수오·양석일·문경수)가 조직되었다. 또 오사카에서도 '제주도4·3사건50주년기념사업오사카실행위원회'(실행위원 강실·김병종·홍가우·김성원·장정봉·오광현·문경수·부총사·정아영·양석일·김민주·고이삼·김중명)가 꾸려졌다. 이 두 단체가 일본에서 4·3 50주년을 기념해 다양한 행사를 개최했다.

도쿄의 첫 행사는 1998년 3월 14일 도쿄 팡세홀에서 500명의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브루스 커밍스 교수 초청강연회와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 제4권 일본어판(일본어 제명 「濟州島四·三事件」) 출판기념회로 꾸려졌다.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유명한 커밍스 교수(시카고대·역사학)는 한국현대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에 특별 초대받아 참석할 정도로 김 대통령과의 인연도 깊었다. 

커밍스 교수의 강연 주제는 '제주도4·3사건과 미군정'이었다. 그는 강연에서 "4·3 때 서북청년단의 테러와 토벌대의 학살극은 이승만 정권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잔혹행위를 묵인하고 지지한 미국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4·3 학살에 대한 미국 책임론'이 미국 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거론된 것이다. 이 행사에 참석했던 4·3취재반 김종민 기자는 커밍스 교수와 특별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 기사는 「제민일보」 1998년 3월 19일자에 크게 보도되었다. 커밍스 교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4·3연구 석사논문을 쓴 존 메릴 박사가 미군정의 실책을 인정하면서도 대규모 학살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벌어졌기 때문에 미국의 직접적인 책임을 부인했다는 말을 김 기자로부터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한국정부가 수립됐지만 한·미간 비밀협약에 따라 미군은 1949년 6월까지 한국의 군대와 경찰을 지휘·통제했고, 따라서 1949년 6월말까지 제주섬에서 발생한 모든 학살극과 잔혹행위에 대해 미국은 윤리적 책임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고 법률적 책임이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도 하였다.

"미군은 토벌대를 훈련시키고 죄수를 심문했다. 그리고 게릴라 수색에 미군 정찰기를 동원했다. 미군은 학살극을 억제하기는커녕 칭찬하고 지지함으로써 '소극적 관여'를 한 것이다. 미군은 자신들이 직접 잔혹행위에 나서는 것은 기피했지만 사태를 진압하는데 있어서 한국인끼리의 잔혹행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그런 점에선 인종주의적인 측면도 있다"

도쿄에서는 4월 4일에 청중 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4·3희생자 추모행사가 별도로 열렸다. 조동현이 주도한 이날 행사는 '이야기하라 한라'라는 제목아래 일본 고참 여배우 싱야 에이코(新屋英子)의 '어떤 할머니의 신세타령' 공연과 김성길(서울대 교수·바리톤), 전월선(재일동포·소프라노)의 추모 노래가 있었다.

한편 오사카에서는 3월 15일 재일한국기독교회관에서 '제주도 4·3을 말한다'라는 주제의 강연회가 열렸다. 문경수 교수(立命館대·한국정치사) 사회로 열린 이날 행사에서 이종원 교수(立敎대·국제정치학)의 4·3의 정치적 의미에 대한 강연과 강실(관서제주도민협회 부회장)의 4·3 체험담이 발표되었다. 오사카에서는 또 3월 21일 주요무형문화재 김윤수 심방이 주재한 4·3영혼진혼굿이 재일 제주인이 가장 많이 사는 이쿠노(生野) 구민센터에서 열렸다. 50년 만에 일본에서 처음 열린 4·3진혼굿에 대거 참석한 유족들은 온통 눈물바다를 이뤘다. 이때 재일동포 음악가 김성구·조박·김군희 등이 출연한 추모 콘서트와 4·3 사진 전시회도 열렸다.

주최 측이 필자와 김종민 기자를 초청하여 이 일본 행사에는 필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필자는 도쿄에서 열린 「4·3은 말한다」 일본어판 출판기념회에서 4·3취재반을 대표해서 인사말을, 오사카 강연회에서는 4·3 진상규명에 대한 강연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문사는 나의 출장을 허락하지 않았다. 4·3 활동에 대해 탐탁지 않게 반응하던 새 경영주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었다. 밖에서는 날이 갈수록 4·3 외연이 넓어지고 있는데 반해, 신문사 안에서는 4·3기획물 연재 자체도 중단될 위기 속에 그 공간이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다음 회는 '4·3 50주년 서울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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