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이맘때 쯤 이 란에 '한 세기의 끝에서 띄우는 편지'를 썼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허위허위 달려 온 세월의 수레바퀴는 또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다. 희망으로 연 새 천년의 끝은 곤두박질한 수은주마냥 풀이 죽어 있다. 뛰는 물가에 경기는 다시 얼어 붙고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노동자들의 어깨를 한없이 움추려들게 한다.

 북구 노르웨이의 오슬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동쪽의 끝 코리아에서 온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수상을 축하하는 거리 행진을 하고 있는데, 서울과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 농민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영하의 거리 위에서 분노의 행진을 하고 있다.

 노벨 평화상의 수상은 그야말로 모든 국민이 축하해야 할 국가적 경사건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굳게 손을 잡고, 남북 화해의 디딤돌을 놓았고, 경제의 대외 신인도가 향상되면서 온 국민을 몰아넣은 아이 엠 에프의 수렁을 벗어나나 보다고, 이제 국력을 탄탄대로 통일의 길로 매진할 수 있나 보다고 생각했건만 하반기로 접어들면서 줄줄이 터져 나온 크고 작은 금융비리와 거대 기업의 부도 위기 등으로 국가 경제는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다.

 대도시의 지하철역엔 떠났던 노숙자들이 철새처럼 다시 모여들고 있다. 철저한 준비 없이 시작한 의약분업으로 의사와 약사, 의사와 정부간의 '목숨을 건' 지리한 싸움에 시민들만 애매한 희생양이 되어 불편은 더욱 가중되었고, 결국 적지 않은 의료보험 수가 인상으로 결론이 나 서민들의 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다. 경제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음에도 정쟁은 끊이지 않아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회의원이냐는 국민들의 볼멘 소리가 높았다.

 남북 문제에 너무 큰 힘을 소진한 것일까. 대통령의 통치력은 갈수록 심각한 누수 현상을 보이고 있다. 내치는 없고 외치만 있다는 극단의 이야기까지 나왔다.

 특정지역에 대한 인사의 편중도 거론되고 있다. 3년도 안돼 총경에서 치안정감까지 고속 승진을 한 서울 경찰청장이 인사기록에 학력 허위 기재 사실이 드러나 취임 사흘만에 옷을 벗은 사례는 대통령을 비롯한 여권 핵심부의 균열이 매우 걱정스런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반증이다.

 대통령도 문제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짐작해 급기야 거국내각 구성이란 특단의 처방을 제시했지만, 야당은 그 실효성을 놓고 신통 찮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수백 억의 국고를 지원할 법을 제정하려는 발상은 아무래도 김대중 대통령이 그 동안 걸어왔던 민주화를 향한 고난의 역정과 투옥, 감금 등 사선을 넘나들며 쌓아왔던 정치 경륜과 철학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야당에 비해 상대적으로 민주적 성향을 가진 여당의원들도 상당수가 총재를 의식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대구 경북 지역의 민심을 달래고 끌어안기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하기엔, 양심 있는 대다수 국민들의 소리를 외면하면서 아무런 명분도 설득력도 없는 정치적 결정을 고수하려는 데 대해 그저 경악할 따름이다.

 어떤 비행기를 타고 가느냐는 코미디 같은 논쟁 끝에 대통령은 노르웨이로 날아갔고, 세계인이 우러러보는 노벨상을 받았다. 수상 소감에서 밝힌대로 이 상은 조국의 평화와 인권의 회복을 위해 온 몸을 던졌던 민주 인사들에게 영광을 돌려야 할 상이다. 그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이제 대통령이 직접 나서 민심을 살피고 자신이 역설한 '민심 곧 천심'의 정치를 실천할 때다.<김현돈·제주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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