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72> 4·3 50주년 서울 행사

4·3 발발 50년만에 서울 한복판에서 처음 열린 4·3 진실규명 촉구 거리행진. 사회지도층 인사와 민주열사 이한열의 어머니 등 2000여명이 참가했다.

미국에도 "학살책임 인정하라" 메시지
중앙언론의 4·3 재조명 기사들도 줄이어

4·3 50주년 서울 행사
"제주4·3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으로 이 민족의 양심과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사건발생 반세기나 된 제주4·3의 진실규명을 토대로 희생자의 억울함을 풀고 짓밟힌 인권과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비단 제주도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위한 일입니다"

이는 1998년 4월 4일 오후 2시 서울 한복판인 종로2가 탑골공원에서 열린 '제주4·3 제50주년 기념식 및 명예회복 촉구대회'에서 선언된 내용이다. 1919년 3월 1일 일본제국주의를 향해 독립선언문을 선포함으로써 3·1운동의 발상지로 상징되는 유서 깊은 곳에서 제주4·3의 명예회복이 선언되었다. 이 행사는 1년 전에 출범한 제주4·3제50주년기념사업추진범국민위원회(상임대표 강만길·김중배·김찬국·정윤형)가 주최하였다.

서울에서 열린 4·3 관련행사 중 처음으로 야외에서 치러진 이날 행사는 화창한 날씨 속에 김원룡 목사, 김성수 주교, 이해동 목사, 김몽은 신부, 신창균 전국연합 고문,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 등 사회 원로, 탤런트 고두심을 비롯한 재경 제주인사, 제주에서 올라간 김영훈·박희수 도의원, 서울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 성황을 이루었다. 행사장 주변에는 '역사바로세우기 4·3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4·3 진상규명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는 플래카드 등이 나부꼈다.

이날 행사는 범국민위 정윤형 상임대표의 개회사와 고희범 사무처장의 경과보고, 김성수 주교와 김몽은 신부,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의 격려사, 김영훈 4·3학술문화사업추진위 상임대표의 연대사에 이어 범국민선언문 낭독, 미국정부 및 상·하원에 보내는 메시지 채택 등 모두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

진관 스님이 낭독한 범국민선언문은 ①김대중 정부의 4·3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공약 성실 이행 ②국회 4·3특위의 즉각 구성과 광범한 조사활동 착수 ③명예회복·피해배상·기념사업 등의 조치를 담은 제주4·3특별법 제정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권영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낭독한 미국정부 등에 보내는 메시지는 ①미군정하에서 발생한 제주4·3사건과 대규모 양민학살 사태에 대해 총체적으로 과오를 인정하고 사죄할 것 ②미군정과 주한미군이 발한 작전명령 등 자료 일체를 공개할 것 ③미군 작전 통제하에서 전개된 초토화 작전과 그로 인한 양민학살·인권유린에 대한 책임 인정 등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념식이 끝난 후 참석자들은 풍물패의 선도를 받으면서 탑골공원에서 대학로 마로니에공원까지 3㎞에 이르는 거리행진을 벌였다. '50년을 넘길 수 없다! 4·3 진실 규명하라!'라고 쓴 대형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행진이 시작되자 일부 서울시민들이 행진 대열에 합세하기도 하였다. 행진 도중 참가자들은 "특별법 제정!" 등의 구호를 외쳤고, 4·3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연도의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다. 이날 행사는 마로니에공원에 도착한 참가자들의 만세삼창을 끝으로 막이 내렸다.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그 준비에 노심초사했던 주최측 일부 관계자들은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사실상 여기까지 오는데는 범국민위 관계자들의 노고가 많았다. 명망가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망라한 조직 구성에서부터 시작하여 1998년에 들어서서는 4·3 알리기 운동에 매진하였다. 제주4·3 명예회복을 위한 도외 제주인 선언문을 채택하여 중앙일간지 등에 광고를 싣는가하면 3월 1일에는 제주4·3 명예회복의 해 선포식을 가졌다. 이어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 제주4·3 제50주년 추모 및 기념주간을 설정하여 학술심포지엄, 역사화 전시회, 4·3희생자 진혼굿, 역사사진전, 4·3문화학교 운영 등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이런 노력의 결과, 그동안 4·3을 '변방의 역사'로 치부하여 침묵을 지켜오던 중앙 언론들이 4·3을 재조명하는 기사들을 내보냈다. 행사 소개는 물론 각종 기획기사들을 통한 피해사례 소개, 진실규명을 촉구하는 칼럼, 정치권의 움직임 등 다양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이런 중앙 언론의 변화는 서울이란 중앙무대에서 4·3 진상규명에 대한 논의를 공론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자신감을 갖게 된 4·3범국민위는 50주년 행사를 마친 후에 4·3특별법 제정운동을 본격 추진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이를 위해 정책기획특별위원회를 구성, 4·3특별법 초안 작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1999년에는 단체 이름을 '제주4·3진상규명명예회복추진범국민위원회'로 바꾸고 정치권에 대한 실질적인 대응에 나섰다. 

☞다음회는 '국민의 정부 출범과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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