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 미술평론가·민족미학회 회원

   
 
     
 
제주 전통 생활문화가 참으로 초라할 때까지 갔다.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존된 것 없고, 그 가치를 바르게 세우려 하지 않는 이 시대에, 누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제주문화의 진정성을 얘기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지고 파괴되는 전통문화를 마치 실제 주류문화, 부상하는 문화로 포장하는 사람들은 작금의 피폐화되는 제주문화의 심각성을 외면한 채 언제나 축제판을 기획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 많은 현대 축제에서 주인은 없고 객들만 잔치를 벌이는 기현상을 자주 봐왔다. 짠물 한 번 몸에 적셔보지 못한 자들이 축제의 주인이 되고, 뒷전에서 갈 곳 없이 소외되는 것은 흙 묻은 옷을 한 번 벗어보지 못한 이 땅의 생산자들이었다.

제주문화는 그리스·로마 문화에 빗댈 수 있는 영웅문화도 아니고, 제주 여성문화 또한 현재 부풀려진 것처럼 강인한 여성의 문화가 아니다. 강인한 여성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잠녀는 사회에서 천대받으면서 자연에 의지하며 먹고 살려고 바둥거린 것이 잠녀의 진짜 모습이었다. 

이즈음 꺼져가는 불씨 같은 전통 생활문화 하나를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제주 전통 돌소금이다. 소금은 인류가 탄생한 이래 인간의 문명을 키워낸 식량과 함께 필연적인 생존의 식료이다. 그래서 소금이 지나온 세월 또한 태초 인간의 나이와 같다.

소금에 대한 우리나라 기록은 「삼국유사」에 처음 나오고, 중국의 기록에는 「서경」에, 소금을 공물로 처음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주례」에는 소금의 종류가 언급되었는데 사신의 접대에는 고염(苦鹽:염지(鹽地)에서 나온 덩어리 소금), 산염(散鹽:바닷물을 달려서 만든 소금)을 쓰고, 왕의 음식에는 이염(飴鹽:石鹽)을 쓴다고 했다. 고래로부터 세금으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 바로 소금과 쇠였다.

소금이 귀하다보니, 14세기 초 고려 충선왕 때 소금 전매법을 반포하여 도염원(都鹽院)을 설치했다. 소금은 모두 의염창(義鹽倉)에 가서 사게 하며, 지방 군현(郡縣) 사람들은 관아에서 베를 바치고 소금을 받아가도록 했다. 백성을 뽑아 염호(鹽戶)로 삼고, 또 염창(鹽倉)을 설치하도록 하니, 백성들의 또 다른 고역이 되기도 했다. 전라도를 포함 한 6도에  염호는 892호였고, 1년에 소금 값으로 받은 베는 4만필에 달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에야 소금 전매제가 폐지됐다.

제주에서 소금 생산을 시작한 효시를 1573년 강려(姜侶) 목사로부터 잡는다면, 이전까지 제주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미 고려 충선왕 때 소금 관리를 관아에 맡겼으니, 그 시초를 섣불리 조선시대 문헌에 의지할 것만은 아니다.

현재 애월읍 구엄리 '빌렛드르' 돌소금밭을 지키는 사람은 조두헌 옹이다. 유일하게 돌소금 제조법을 아는 조옹은 올해로 벌써 76세가 됐다. 고령이지만 청년의 기개로 새하얀 돌소금을 주무르며 웃는 조옹의 모습에선 지난날 돌소금 밭을 일구며 살아온 희노애락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두 발목에는 짠 소금물이 살갗에 그려낸 무늬가 문신처럼 얼룩져 있다. 이제 직사열과 복사열로 만들어내는 돌소금 생산방식은 원시적인만큼 최후의 존망의 기로에 서 있다. 돌소금으로 육화된 조옹의 인생은 어느 덧 세월의 끝자락에서, 소중했던 돌소금 문화의 부활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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