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77> 4·3 수형인 명부 발굴

 추미애 의원, 기록보존소 찾아 기록 입수
'탁상재판' 군법회의 불법 입증 단초 제공

4·3 수형인 명부 발굴

추미애 의원의 4·3 수형자 명부 발굴 소식을 1면 톱기사로 보도한 「제민일보」 1999년 9월 16일자 기사. '4·3 정부기록 첫 발굴'이란 제목이 눈길을 끈다.

1999년 9월 15일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은 정부가 소장하고 있던 4·3 당시  1650명의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1321명의 일반재판기록을 발굴해 공개했다. 추 의원은 정부기록보존소로부터 관련 자료를 입수해 이날 공개한 것인데, 4·3 관련 정부문서 공개는 4·3 발발 50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어서 중앙언론도 크게 보도하는 등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

추 의원이 4·3 관련 정부자료를 찾기 위해 행정자치부(행자부) 산하 정부기록보존소(대전 소재)를 찾은 것은 그해 초였다. 추 의원의 정부기록보존소 방문에는 도현옥 보좌관 외에도 4·3취재반 김종민 기자, 도순리 '형살자 명부'를 제공했던 이도영 박사가 동행했다. 추 의원이 4·3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정부기록보존소 측은 추 의원 일행을 정중하게 맞았다. 당시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소속인 추 의원은 행자부 업무를 예리하게 파고드는 깐깐한 일솜씨에다 국민의 정부에서 '잘 나가는 국회의원'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초선인데도 대통령직 인수위원, 국민회의 총재특별보좌역 등 그녀의 직함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정부기록보존소는 추 의원의 자료 요청에 "제주도민들의 4·3 관련 기록물 열람 요청이 있어서 현재 고학력 실업자를 투입하는 공공근로사업으로 부산지소 지하서고의 기록물들을 전산입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제주4·3연구소(소장 강창일)와 유족들의 자료 열람 요청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추 의원 일행은 샘플로 남로당 제주도당 핵심간부를 지낸 조몽구(아버지와 처자식 등 온가족이 몰사당했으나, 본인은 일반재판에서 징역 10년 선고 받음)의 판결문을 요청했다. 그런데 정부기록보존소가 제출한 것은 판결문 속에 적혀있는 이름과 주요 내용 등을 도려낸 너덜너덜한 판결문이었다. 정부기록보존소 측은 신중을 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그만큼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추 의원은 정부기록보존소의 소극적인 자세를 질책했다. 추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수차례 약속했다"면서 정부 기록물의 공개도 공약사항이기 때문에 정부기록보존소가 분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추 의원 측은 이어 4·3 관련 재판기록 일체와 연좌제 적용자료, 심문조서, 군·경의 작전·정보 기록 등을 요청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정부기록보존소는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와 일반재판 기록을 찾아내어 추 의원에게 제출한 것이다.

세상에 처음 나온 4·3 관련 재판기록 중 특히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가 이목을 끌었다. 제주4·3 당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 실시되었다. 1차 871명과 2차 1659명 등 모두 2530명이 저촉되었다. 추 의원이 공개할 때에는 2차분 중심으로 그 일부인 1650명의 수형인 명부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4·3 당시 군법회의는 법률이 정한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지 않은 '탁상 재판'이었다. 2003년 정부 4·3위원회는 4·3 군법회의가 불법적인 재판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가 화제를 모은 것은 그 대상자들이 대부분 행방불명되었기 때문이다. 군법회의 대상자들은 그 당시 제주도에 형무소가 없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되었다. 그런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각 형무소별로 '불순분자 처리방침'에 따라 상당수가 총살되었다. 물론 서울 등지의 형무소에서는 옥문이 열리면서 재소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도 했다. 과거 정부는 그렇게 처리해 놓고도 유족들에게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유족들은 반세기가 넘도록 부모 형제가 어디서 희생되었는지 내용도 모르고, 시신도 찾지 못한 채 한 맺힌 세월을 살아야 했다. 군법회의는 형량도 턱없이 무거웠다. 사흘만에 345명을 사형선고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해당자들이 60년만인 2008년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옆에서 시신으로 뒤엉킨 채 발굴되었다.

결국 이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 발굴은 4·3 행방불명 희생자의 역사를 새로 기록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세월 숨죽이며 살아온 그 유족들은 2000년 3월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를 결성하고, 4·3 진실찾기의 가장 강력한 유족모임으로 탄생했다. 이후 그들의 끈질긴 노력은 군법회의 수형인들의 정부 4·3 희생자 인정, 국제공항에서의 유골 발굴, 4·3평화공원의 행방불명 희생자 개인 표석 설치 등의 결실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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