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81> 잇따른 4·3 학술행사

1990년 4월 1일 제주4·3연구소 주최로 제주가톨릭회관에서 열린 제1회 4·3 학술세미나.

 매해 세미나 개최…4·3진실찾기에 매진
'4·3 재조명' 제주학회 학술대회도 눈길

잇따른 4·3 학술행사
1998년 3월 21일 사단법인 제주학회(회장 고부자 단국대 교수)가 주최한  '4·3 5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제주시 삼성화재빌딩 강당에서 열렸다. 이 학술대회가 눈길을 끈 것은 4·3관련 단체가 아닌 학술단체에서 4·3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출범 20주년을 맞은 제주학회는 해마다 제주의 중요한 이슈를 중심으로 발표회를 열어왔지만 4·3문제를 다룬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4·3 50주년을 맞아 그만큼 4·3문제가 전 방위로 확산되고 있었다.

이 학술대회는 '4·3 반세기의 역사적 재조명'이란 큰 주제 아래 5개의 주제가 발표되었다. 주제는 '4·3을 둘러싼 국제 정치학'(고성준 제주대 교수), '4·3 50주년과 아시아의 평화네트워크'(강창일 배재대 교수), '4·3문제의 공론화 과정과 지방자치'(김영훈 도의원), '4·3은 왜 묻혀 있었는가?'(양조훈 제민일보 편집국장), '문화적 관점에서 본 4·3 50주년'(현길언 한양대 교수) 등 다양했다.

이날 종합토론에서 참석자들은 한목소리로 "4·3은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냉전과 분단이라는 당시대의 역사적 구조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용서와 화합을 위해서도 반드시 진상이 밝혀져야 하며, 특히 양민학살 부분에 대해서는 정부의 사과와 함께 치유책이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정토론자로는 강근형(제주대 교수)·김기협(역사학자)·김현돈(제주대 교수)·오성찬(소설가)·조성윤(제주대 교수) 등이 나섰다. 특히 현길언 교수와 김현돈 교수의 토론이 뜨거웠다. 현 교수는 "4·3사태는 그 시·공간적 배경과 사건의 인적, 정치사회적 요소, 그리고 발발 양태와 진정 상황 등 다양한 측면에서 주변적 속성을 갖고 있다"며 '주변성 논리'를 폈다. 이에 김 교수가 "4·3은 미국의 동북아 지배 전략과 내부의 민족 모순, 한국사회에서 제주도가 처한 특수한 상황이 중첩돼 생긴 것으로, 4·3의 주변성 논리는 4·3문제를 희석시킬 수 있다"고 반박한 것이다.

한편 4·3 진실찾기 운동의 자료 축적과 학술적 논의의 중심에는 1989년에 개소한 제주4·3연구소가 있었다. 4·3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이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통해 우리 역사 발전에 올곧게 기여한다는 목적 아래 출범한 연구소는 1990년부터 연례적으로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이런 활발한 학술활동은 4·3에 얽힌 다양한 문제를 심층 분석하는 논의의 토대가 됐다.

제주4·3특별법 제정 이전의 10년 동안 학술 세미나를 통해 다뤄진 주제들은 4·3이 왜 일어났는가를 규명하는 배경과 원인에 대한 분석, 동시대 다른 지역과의 비교분석, 4·3항쟁의 의미와 성격, 진압 작전과 주민 학살, 미군정의 토벌 정책 등이다. 또한 4·3 연구·조사가 어떻게 이뤄졌고, 동시대를 살았던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발표도 있었다.  ▶ 도표 참조

이 학술 세미나의 주제들을 살피다보면, 한 가지 달라진 점이 눈에 띈다. 즉, 1994년까지 당당히 표현되던 '항쟁'이란 용어가 사라지고, 1995년부터는 아무 꼬리표 없이 '4·3'으로 표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3문제에 접근하면 할수록 "어떻게 하면 4·3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하는 담론에 부닥친다. 4·3진상규명 운동세력이 4·3을 제도권 내에서 공론화하고, 국가가 직접 나서서 4·3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주된 목표로 삼으면서 이런 변화가 이뤄졌다고 본다.

제주4·3연구소는 4·3 50주년을 맞아 특별한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노벨평화상 수상자까지 참가하는 '국제학술대회'를 제주에서 개최하는 것이었다.

☞다음회는 '4·3 국제학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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