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선 서귀포YWCA사무총장

   
 
     
 
일주일, 심지어는 한달이 후딱 지나버리는 현대 사회를 살면서 누구나 가끔은 느긋한 여유로움을 그리워하며 지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충전을 위해 여유로운 곳을 찾는지도 모른다. 지난주에 '시간도 머무는 곳'이라는 전라남도 신안군의 증도를 다녀왔다. 증도는 아시아 최초 슬로우시티로 지정됐고 국내 최초 갯벌도립공원 지정, 소금박물관과 태평염전이 근대문화유산(등록문화재)으로 등록됐는가 하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전국 최초의 금연의 섬으로 공해 없는 자연 환경 속에서 지역의 먹을거리와 고유의 문화를 느끼며 인간다운 삶을 되찾자는 느림의 미학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섬이었다.

속도에 집착하지 않고 느림을 느끼며 천천히 걷는 길, 많은 사람들은 길을 걸으며 인생을 고민하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느림의 미학은 증도만이 아니라 가까운 제주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의 인생길은 '도로'가 아니라 '길'에 비유할 수 있다. 고속으로 달리는 도로가 아니라 숲속에 난 오솔길이다. 특히 고속도로는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만을 위해 만들어졌다. 거기에는 시작과 끝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과정이 생략돼 있다.

또한 뒤차에 쫓기고, 옆차에 쫓기고, 그러다 결국 자신에게 쫓긴다. 하지만 오솔길은 꽃이 주변에 피어있고, 나무도 보고 사람들도 만나고, 힘들게 오르다가 쉬이 내려가는 길을 걸을 때 마음이 여유로워 진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길을 다녀온 분들의 이야기를 감명깊게 들은적이 있다. 나도 언젠가 한번은 꼭 다녀올 작정이다. 산티아고길 곳곳에는 '알베르게'라고 하는 여행자들의 숙소가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소박하지만 잘 곳도 있고, 먹을 것도 있으며, 마실 것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처음에 먹을것, 마실것, 입을것들을 잔뜩지고 길을 걷는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줄이고 줄여서 꼭 필요한 것들만 담는다고 하지만 어느새 가방은 묵직하게 된다고 한다.

하지만 몇 개의 '알베르게'를 거치면서 사람들은 하나씩 버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 한 알베르게에서 다른 알베르게까지 오직 빵 두 쪽과 물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버리고 비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의 인생길 역시 버리는 길임을 깨닫는다고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버려야할 것들이 있다. 정리해보면 첫째, 길들여진 습관에 대한 익숙함이다. 둘째, 과거의 업적에 대한 도취이다. 셋째, 이미 획득한 소유에 대한 집착이다. 넷째,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이런 것들을 떨쳐버려야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는 열린 사람이 아닐까.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지역도 마찬가지다. 제주도가 세계7대 자연경관 선정을 위해 온갖 역량을 모으고 있다. 이러한 힘의 결집이 단순히 제주를 알리고 최종 결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인이 인정하는 천혜의 자연자산의 주인이라는 자긍심과 새로운 비전을 추구하는 역량 결집의 모티브가 돼야 한다. 훗날 제주를 찾는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제주의 경관뿐만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제주사람들의 마음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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