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90> 4·3도민연대 출범

1999년 2월 1일 도민연대준비위원회 발족직후 심각하게 회의하는 모습. 도민연대는 그해 3월 8일 4·3운동 상설조직으로 출범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나서라" 강력 촉구
 범국민위와 특별법 제정 운동 견인차 역할

4·3도민연대 출범
1999년 3월 8일 '제주4·3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도민연대'(이하 '도민연대')가 제주관광민속관에서 결성대회를 갖고 정식 출범했다. 도민연대의 출범은 4·3문제 해결이라는 단일 목적을 위해 상설된 조직이라는 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4·3문제 해결의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4·3운동 진영에서는 4·3발발 5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치렀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물이 없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4·3문제 해결의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는 국회 4·3특위 구성과 4·3특별법 제정이 지지부진했기 때문이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다고 하나 국민회의 4·3특위가 두차례 공청회를 개최했을 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국회에 계류 중인 4·3특위 구성 결의안도 방치되고 있었다. 민주정부가 출범한 이 시기마저 놓쳐서는 안된다는 자각, 반백년 맺혀온 제주도민의 한을 새천년으로 넘길 수 없다는 절박감이 4·3진영의 팔을 걷어붙이게 한 것이다.

도민연대는 이날 결성선언문에서 "새 정부가 들어선지 1년이 지났으나 4·3문제 해결의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면서 "도민들의 강력한 의지가 결집되지 않은 한 문제 해결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도민연대를 결성하게 됐다"고 밝혔다. 도민연대는 특히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내는 촉구문을 통해 "그간 정부를 향한 강력한 대응은 자제해 왔으나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 없다"고 전제하고 "늦어도 오는 4월 3일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을 때는 위령제 행사에 참석한 유족과 도민의 원성이 폭발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해결 방안 마련을 촉구했다.

도민연대는 그간 한시적인 위령사업과 행사를 추진해온 '4월제공동준비위원회'와 '제50주년4·3학술문화사업추진위원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통합하는 형식으로 결성됐다. 2월1일 도민연대준비위원회가 발족됐고, 본격 출범하기까지에는 여러 진통도 있었다. 그러나 4·3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중앙정부에 제주도민사회의 결집된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

상임대표로는 김영훈 도의회 부의장, 양금석 전 도의원, 임문철 신부 등 3명이, 공동대표로는 강창일·고성화·김평담·양보윤·오만식·윤춘광·이은주·허태준 등 8명이 선임됐다. 또 실무 책임을 맡을 운영위원장에 양동윤, 사무국장에 오영훈이 뽑혔다.  

도민연대 결성식에 이어 신산공원 내 방사탑 앞에서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기원제가 거행됐다. 도민연대는 이 행사를 계기로 해마다 4월1일 '4·3해원 방사탑제'를 지낸다. 결국 이날의 행사가 방사탑제의 시원이 된 셈이다.

이렇게 출범한 도민연대는 3월 22일 제주4·3사건민간인희생자유족회(회장 박창욱)와 제주4·3진상규명명예회복추진범국민위원회(공동대표 강만길·김중배·김찬국·정윤형)와 공동으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를 발표했다. 3개 단체는 "집권 여당인 국민회의와 국회에 기대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시의성과 시급성에 비춰볼 때 더이상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대선 때 4·3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한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나서라"고 요구했다. 이들 단체는 "국회 4·3특위가 구성되고 특별법이 제정되어야만 제주도민에 대한 공약을 지키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워온 세계적인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더욱 확고하게 될 것"이라며 대통령의 의지 표명을 거듭 촉구했다.

한편, 필자도 이에 발맞춰 「제민일보」 3월 29일자에 '대통령이 나서야 할 때'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썼다. 3개 단체가 청원서를 제출하게 된 것은 "한마디로 국민회의와 국회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고 지적하고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 요구된다"고 밝힌 것이다.

도민연대는 4월에는 지방의회와 합동으로 4·3문제 해결 촉구를 위한 전국홍보와 국회 방문활동을 벌인다. 이 내용은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

8월에는 도민연대 부설 4·3고충상담소(소장 문창우 신부)를 개설했다. 이 상담소에서는 4·3 당시 부상자의 육체적 고통 치유, 행방불명자의 생사 규명, 잘못된 호적 정정, 사망자의 사망 일시 확인 작업 등 희생자와 유족들의 고충 상담과 처리에 비중을 두었다. 또한 「4·3연대」란 소식지도 만들었다.

10월 들어서는 거리로 나와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도민대회를 열었다. 이 행사는 모두 4차례 진행되는데, 이 역시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소개하겠다.

그리고 4·3특별법 제정 운동을 보다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1999년 10월말에는 제주도내 24개 유족 및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는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로 참여 범위를 넓혔다. 결국 4·3특별법 제정 운동을 위해 서울에서는 4·3범국민위원회가, 제주에서는 4·3도민연대와 4·3연대회의의 활동이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회는 '4·3유족회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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