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95> 여야 정치권 움직임


  여야 "적극 노력" 약속 후 임시국회서 침묵
 "DJ에 4·3문제 묻겠다" 미스제주 발언 화제

여야 정치권 움직임
1999년 4월 제주도의회 의원뿐만 아니라 4개 시·군의회 의원, 4·3 유족, 4·3 관련단체 임원 등 각계인사들이 참여한 전국순례 홍보단의 활동이 정치권에 자극을 주고 파장을 일으킨 것은 분명했다. 특히 이듬해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둔 여야 정치권에서는 제주사회의 최대 이슈로 부각된 4·3문제를 비껴갈 수 없는 상황임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홍보단의 국회 방문 닷새 후인 4월 13일 국회의장 집무실에서 여야 원내총무회담이 열렸다. 박준규 국회의장이 주재한 이날 총무회담에서 국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구성안 통과에 원칙적인 합의가 이뤄졌다. 국민회의 손세일, 자민련 강창희, 한나라당 이부영 등 3당 원내총무는 제주4·3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날 총무회담에서 야당인 한나라당 이 총무가 국회에 계류 중인 4·3특위 구성안을 조속히 처리하자는 제안을 하자 공동여당인 국민회의·자민련 총무도 원칙적인 동의를 했다. 다만 여당 측은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부와의 협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달라는 취지의 단서를 달았다. 

국회의장이 주재하고 여야 원내총무가 원칙적인 합의를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제주지역 언론은 저마다 "국회 4·3특위 구성된다"고 대서특필했다.  4·3연구소·도민연대 등 4·3 관련단체들도 일제히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합의가 지금까지의 국민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모양새 갖추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연구소), "내년 총선을 의식한 정치인들의 면피용으로 이용할 경우 정치투쟁을 벌일 것"(도민연대)이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우근민 도지사도 4월 23일 국민회의 중앙당사 대회의실에서 열린 지방자치정책협의회에서 국회 4·3특위 구성과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추진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청했다. 우 지사는 특별법이 제정될 때 실무기획단에 제주도 공무원의 참여와 위령사업 시행에 대한 정부와의 역할 분담을 아울러 건의했다.

4월 26일에는 여야 수석부총무회담에서 국회 4·3특위 구성에 관한 청원심사 소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국민회의 유용태, 자민련 변웅전, 한나라당 이규택 등 3당 수석부총무는 청원심사 소위를 국민회의 3명, 자민련 1명, 한나라당 3명 등 모두 7명으로 구성하되 소위원장은 국민회의 수석부총무가 맡는다는데 합의했다. 여기서 말하는 '국회 4·3특위 구성안'은 1996년 11월 제주도의회가 제출한 청원서를 뜻한다.  

그런데 제주도민과 4·3 유족들에게 잔뜩 기대를 걸게 했던 정치권의 립서비스는 여기까지였다. 임시국회가 열렸지만 4·3특위 구성안 논의는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5월 17일 제주도의회와 4개 시·군의회 의장은 공동명의로 "4·3 홍보단이 국회와 여야 정당 등을 방문했을 당시 약속했던 '국회 4·3특위'를 조속히 구성할 것"을 촉구하는 서한을 국회의장과 각 정당 대표들에게 발송했다. 그런데도 별 반응이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4·3진영은 정치권을 압박하기 위해 7월 2일 다시 국회를 찾았다. 이 방문단은 도의회 4·3특위 의원과 유족회·도민연대를 비롯한 4·3 관련단체 임원 등 10여명으로 구성됐다. 방문단의 행보에 자극을 받은 여야 원내총무 3명은 그날 오후 다시 회동, 4·3특위 구성문제를 협의했다. 이날 회의에서도 한나라당 이부영 총무가 적극 나선 반면 국민회의 손세일, 자민련 강창희 총무는 "양당의 의견 조율이 안된 상황"이라며 추후에 다시 논의하자는 식이었다. 공동 여당 간의 의견 차이가 있음이 노출된 것이다.

이 무렵 신선한 화제를 모은 일도 있었다. 그해 5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미스코리아 본선대회에 출전한 미스제주 진 김은희 양(이화여대 재학)이 "만일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면 무엇을 물어볼 생각인가?"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대통령의 선거 공약인 제주4·3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관해 묻고 싶다"고 당차게 답변한 것이다. 놀라운 대답이었다. 도의회 4·3특위와 도민연대가 공동으로 김 양에게 감사패를 전할 정도로 그녀의 발언은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정작 김대중 대통령은 그 무렵 과거사 해결과 인권법 제정문제로 괴로운 처지에 있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수첩에 메모해서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장관들을 독려하고, 정당 또는 시민사회단체들을 만나 수없이 토론했지만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다. 여소 야대의 정치 환경, 보수성향의 자민련과의 공동정부 운영, 보수단체의 반발, 해당 장관들의 소극성 등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1999년 가을 정기국회가 착착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회는 '대통령 내도와 4·3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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