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얼마 후 필자는 제정을 위해 애썼던 몇몇 분들과 함께 대통령이 특별법에 서명하는 모습을 직접 보는 감동을 맛볼 수 있었다.서명을 마친 대통령의 말이 인상적이었다.“여러분들 중에 혹시 개혁이 지연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가진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저는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비록 어려운 점이 있지만 제가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필자는 개혁의지에 대해서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그런데 요즘 “당신이 그렇게 믿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는데,나라가 어찌 이 모양이냐?"는 핀잔을 듣게 된다.

 정부가 자랑하는 개혁정책 중의 하나인 “기초생활 보장법”은 사회복지를 한 차원 높인 획기적인 법률이었지만,시행과정에서 사회복지제도의 후퇴가 되어버렸다.또한 의료개혁도 어설픈 준비로 국민들의 피해만 가중시킨 채 봉합되고 말았다.이런 사례들은 개혁방향도 중요하지만 추진하는 과정 역시 중요한 것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치밀한 준비와 국민적 합의 없는 개혁은 생사람만 잡게 되는 것이다.사정이 이러니 공공부문 개혁도 힘없는 노동자들만 거리로 내몰고,금융통폐합도 인원감축만 눈에 들어온다.이래서야 어떻게 개혁이 국민을 위한 개혁이 되고,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제주의 상황을 보아도 가슴 아프기는 더하다.연일 케이블카를 둘러싼 광고·성명전이 도민들의 찢어진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한라산을 사랑하고 보호하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같은 사랑과 목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이렇게 분열되고 상호 비방의 수준에까지 이른 현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진실된 사랑이 아니라,다른 이유들이 감춰져 있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시점은 아닌가? 누구의 체면도 중요한 시점이 아니다.누구의 승리가 필요한 때도 아니다.한라산의 체면이,도민 모두의 승리가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케이블카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된다면 ‘동강 지키기 운동’처럼 전국의 환경단체가 개입하게 될 것이다.이미 불교계에서는 결사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고,다른 종교계의 상황도 단순하지는 않다.한편에서 관광활성화 방안으로 지지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노인회와 장애인회 등에서 정상을 오를 인권 차원에서 케이블 카의 설치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쪽으로 설익은 결론이 난다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우도정은 논란을 끝낼 명분으로 도민설문을 추진하고 있으나 이는 케이블카만 보고 그 후의 상황을 보지 못하는 단세포적인 정책이다.찬성론자이건 반대론자이건 상처는 이미 충분히 받았다.도민투표 과정에서 생기게 될 극심한 도민 분열을 어떻게 감당하고 치유하려는가? 온 국민이 염원하는 개혁도 충분한 준비와 국민적 합의 없이 추진되었을 때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도정이 설치·포기냐,찬성·반대냐 하는 흑백이원론에서 벗어나 제3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한라산이 몸살을 앓고 있다면 수술을 해야 한다.그러나 아무 때나 칼을 들이댄다면 돌팔이 밖에 안 된다.어디를 어떻게 어느 만큼 수술해야 할지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언제냐 하는 것이다.한라산을 죽이느냐 살리느냐는 기로에서 함부로 손을 대어 죽이고 나면 회생시킬 수가 없기에 돌다리도 다시 한번 두드려 봐야 한다.도민들의 분열이 극대화된 지금 시점은 결코 때가 아니다.제주도에는 케이블카 외에는 다른 시급한 과제가 없는가?<임문철·서문성당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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