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98> '불법계엄령' 보도 송사 ①

1999년 10월6일 제주도내 18개 시민사회단체가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공동기자회견을 갖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에게 즉각 소송을 철회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보도 잘못됐다" 정정보도 및 3억원 청구
 "후안무치한 소송"…4·3진영 외연 넓혀져

'불법계엄령' 보도 송사 ①
1999년 10월 7일, 4·3계엄령 다툼에 대한 첫 공판이 비상한 관심 속에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가 '4·3계엄령은 불법'이라고 보도한 「제민일보」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소송은 원고가 패소하고, 피고인 「제민일보」가 승소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2년여가 걸린 이 소송의 진행과정에서 4·3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법정에서 계엄령 하의 양민 학살 실태를 증언했고, 결국 사법부가 공권력에 의한 불법학살극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 송사가 4·3 진영의 외연 확장과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제민일보」는 1997년 4월 1일자 1면 톱기사로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고 보도했다. 4·3 때 제주도민 대량 학살의 법적 근거로 알려진 계엄령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됐고, 그 계엄령 하에서 양민 학살이 자행됐음을 밝힌 것이다. 이에 대해 이승만의 양자가 신문사를 상대로 3억원의 손해배상 소송까지 제기하면서 4·3 진영의 공분을 샀다.

첫 공판이 열리기 하루 전인 10월6일 4·3도민연대·4·3연구소·제주지역종교인협의회·천주교제주교구정의구현사제단 등 제주지역 18개 시민사회단체가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인수의 처사를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집단학살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승만 씨의 양자가 망부를 대신해 사죄하기는커녕, 마치 제주 양민 학살의 책임이 없다는 듯 합법 계엄령 운운하고 있다"고 성토하고, "제민일보 4·3취재반을 상대로 명예훼손죄로 고발한데 대해 그 뻔뻔스러움과 몰염치함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고, 이 행위가 다시금 유족들과 도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이어 이인수에게는 후안무치한 소송의 즉각 철회와 제주도민에 대한 사과를, 재판부에게는 본 사건이 갖는 중대성을 감안해 진실을 밝히는 공정한 재판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많은 제주도 시민사회단체가 공동으로 4·3문제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결속된 시민사회단체들이 20여일 후인 10월말에는 '4·3연대회의 결성'에 동참해 본격적인 4·3특별법 제정운동을 벌이게 된다.

한편 재판을 앞두고 양쪽의 변호사 사이에 한바탕 기 싸움이 벌어졌다. 이인수 측 이진우 변호사는 이 소송을 서울지법에 제기했다. 이 변호사는 민정당 정책위의장과 국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정치 성향이 강한 거물 법조인이었다. 이에 맞선 소장 그룹의 피고 측 문성윤 변호사는 먼저 재판을 제주지법으로 옮기는 이송신청을 했다. 이 재판은 서울보다는 제주에서 진행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울지법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결정을 하자 원고 측 변호사는 즉각 반발했다. 이 결정에 불복한 원고 측이 항고, 재항고까지 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마저 지고 말았다.

재판을 제주지법으로 옮기면서 기선을 잡은 문 변호사는 피고 측 증인으로 관련기사를 썼던 김종민 기자를 내세워 상대방 주장의 빈틈을 파고드는 전략을 썼다. 김 기자가 법정에 선 것은 3차 공판이 열린 2000년 1월 20일이었다. 김 기자는 "4·3때 계엄령이란 이름아래 60세 이상 노인부터 10세 미만의 어린아이까지 무차별 학살당했음에도 이런 중요한 계엄령에 대해 자료마다 그 선포날짜가 제각각이어서 특별히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취재 배경부터 설명했다. 이어 취재 과정에서 1948년 11월 17일의 계엄령이 계엄법 제정보다 1년이나 앞서 선포됐고, 미군 보고서에도 '비상사태'를 '계엄령'으로 잘못 사용했다고 기록된 내용 등을 찾아내어 국내외 학자와 전문가의 자문을 받은 결과 '불법 계엄령'이란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재판은 회를 거듭할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재판 때마다 방청석은 만원을 이뤘다. 하이라이트는 2000년 3월27일 4·3 피해자 5명이 법정 증언석에 섰던 5차 공판 때였다. 사상 처음으로 유족들을 직접 법정에 세우게 된데에는 이보다 두달 앞서 내려진 서울고법의 판결이 영향을 미쳤다.

이인수 측은 「제민일보」 뿐만 아니라 '4·3계엄령 불법'기사를 함께 보도한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정정보도 등의 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이에 대해 서울고법은 2000년 1월20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계엄선포는 불법이었다'는 보도는 근거가 없는 만큼 정정보도하라"는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이 미군정과 공모해 의도적으로 양민을 학살했다'는 부분에 대해선 정정보도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다음회는 '불법계엄령 보도 송사'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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