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01>거리로 나선 4·3운동

▲ 1999년 10월 9일 제주시청 옆 어울림마당에서 열린 '4·3쟁취를 위한 1차 도민대회'. 이런 거리행사가 계속 열렸으나 도민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15대 마지막 국회 앞둬 연이은 '도민대회'
도민사회는 냉담…기구 확대 필요성 절감

거리로 나선 4·3운동

1999년 10월 '제주4·3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도민연대'가 제주4·3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해 3월 출범한 4·3도민연대가 한글날인 10월9일 오후 제주시청 옆 어울림마당에서 개최한 첫 거리행사의 이름은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1차 도민대회'였다. 

그동안 4·3도민연대는 유족회, 범국민위와 함께 김대중 대통령에게 드리는 청원서를 발표했는가 하면 도의회 등과 연대하여 중앙정부와 정치권을 압박하는 전국순례 홍보단 활동도 벌였다. 부설기관으로 4·3고충상담소를 운영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회 등을 방문해 국회 4·3특위 구성과 특별법 제정 등을 촉구했다.

그때마다 여야 정치권은 곧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번번이 '립서비스'에 그쳤다. 별 소득이 없이 정기국회 시즌이 다가오면서 도민연대 관계자들은 초조해졌다. 제15대 국회의 마지막이자 20세기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정기국회여서 더욱 그랬다.

그 시점에 이르자 국회 4·3특위 구성은 별 효력이 없어 보였다. 막상 국회에 특위를 구성한다고 해도 이듬해 봄 총선 직후 바로 특위가 해체되는 수순을 밟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민연대는 국회 4·3특위 구성안을 접고 오로지 특별법 제정운동에 매진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런 의지를 결집하고 도민사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거리 캠페인을 벌인 것이다.

제1차 도민대회에서 김영훈 도민연대 상임대표는 대회사에서 "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주말집회와 상경투쟁을 벌일 것이며, 전국 시민사회단체들과도 힘을 합쳐 특별법 쟁취투쟁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다. 고희범 4·3범국민위 운영위원장과 오만식 도의회 4·3특위 위원장의 연대사도 발표되었는데, 모두 힘을 합쳐 반드시 특별법 제정을 쟁취하자고 역설했다.

이날 대회에서 주최 측인 도민연대는 제주출신 세 국회의원을 향해 포문을 열었다. 모두 한나라당 소속인 이들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에서 도민연대는 "4·3에 대한 한나라당의 당론은 무엇인지, 올해 정기국회에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약속은 변함이 없는지, 국민회의가 성의를 보이지 않는다면 독자적으로 법안을 제출하겠다고 했는데 그 시기는 언제인지?" 등을 따진 것이다.

그런데 도민연대 관계자들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공개질의서 발표 이틀만인 10월11일 제주출신 국회의원 3명이 공동발의로 이번 정기국회에 4·3특별법안을 상정하겠다면서 그 시안을 전격적으로 공개한 것이다. 도민연대를 비롯한 4·3단체들은 즉각 환영의 뜻을 밝히면서도 '내년 총선을 앞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정치적 책략이 아니냐'는 의구심도 떨치지 못했다. 그 과정은 나중에 자세히 다루겠다.

이런 정치적 파장이 일어나는 가운데 제2차 도민대회가 10월16일 제주시 중앙로 주택은행 앞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국민회의가 타깃이 됐다. 먼저 "4·3특별법 제정과 정부차원의 해결을 약속한 대통령의 진심을 믿고 표를 몰아주었다"면서 DJ의 공약 이행을 촉구했다. 이어 "국민회의 제주도지부장과 각 지구당 위원장들은 돌부처처럼 꿈쩍도 않은 채 무소신·무관심·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다"면서 "이런 행태에 대해 준엄한 정치적 심판을 내릴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런 공격이 주효했는지 국민회의 제주도지부에서 독자적인 특별법 시안을 만드는 등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제3차 도민대회는 10월23일 역시 중앙로에서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 눈길을 끈 사람은 인기가요 '바위섬'의 가수 김원중이었다. 전남대 출신인 그는 1980년 5·18 민주항쟁 당시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져 상처와 슬픔으로 가득한 광주를 그래도 사랑할 것이라는 뜻을 담아 '바위섬'을 작사·작곡했다고 한다. 그는 상처를 입은 광주와 제주의 연대 필요성을 강조하며 '바위섬'을 불러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이런 도민연대의 가열찬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사회는 4·3특별법 제정운동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냉담한 분위기'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이름은 '도민대회'라고 붙였지만 참석자는 수십명에 불과했다. 진보적 인사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가 대부분이었다. 행사장에서는 4·3유족들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때까지도 '4·3'이란 문제를 안고 거리로 나서는 게 생소했다. 더군다나 4·3특별법이 제정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이래저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24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10월28일 출범한 '4·3특별법쟁취를위한연대회의'는 이런 과정을 겪은 후 태동한 것이다.

☞다음 회는 '4·3연대회의 출범'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