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1월,일본 아이치(愛知)현의 중심도시인 나고야(名古屋)시에서는 국제박람회 개최를 알리는 홍보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나고야시에서 약간 벗어난 외곽 소도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곳곳에 깃발이 나부끼고 소식지를 포함하여 각종 홍보물이 배포되고 있었다.한마디로 나고야시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도시가 온통 하나가 되어 박람회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지에서 목격한 이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 박람회가 5년 후에나 열리게 될 ‘2005년 일본 국제박람회’를 염두에 둔 사전 홍보라는 점에 있었다.그들은 2005년에나 개최될 미래의 이벤트를 위해서 5년을 준비하며 오늘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 앞의 과제나 문제 때문에 오늘에 파묻히기 십상이다.오늘의 일은 결코 경시할 수가 없으니,누군가가 이 일에 매달리는 것은 소중한 일일 수밖에 없다.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누군가가 미래를 위해서 비전을 그리고 그 때를 구상하는 일도 그에 못지 않게 소중한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인 1868년,일본은 그간 전국을 지배해 오던 도쿠가와 막부군과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조정의 군대가 격돌하면서 명치유신을 둘러싼 내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다.교토 근교에서 발발된 내전은 전국으로 불똥이 튀기 시작했고,급기야는 도쿠가와 장군의 居城이 있던 에도(지금의 도쿄)에서도 총격전이 벌어진다.

 그러나 근대 일본의 건설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팔짱을 끼고 유유자적하게 내란을 관망하고 있었다.내란의 혼란 때문에 시중의 모든 상점은 철시하고 있던 시국이었다.그러나 후쿠자와는 자신이 경영하는 慶應義塾(지금의 게이오大學)에 대해서는 휴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도쿄에서 전투가 시작되는 그 날도 경응의숙은 수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후쿠자와에게는 한가지 확신이 있었다.이 내란이 끝나면 결국에는 일본의 미래를 건설할 인재들이 필요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그래서 국가에서조차도 학교 문을 걸어 잠근 당시에 후쿠자와의 경응의숙만은 유일하게 학문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학문으로써 미래 일본을 일으켜 세우겠다는 후쿠자와의 확신은 강고한 것이었고,그의 확신은 훗날 결실을 맺는다.경응의숙을 일본 사학의 명문으로 성장시킨 후쿠자와는 신식 학문을 몸에 익힌 수많은 신지식인을 실업계로 진출시켰고,이들은 일본 경제의 중추로서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한때의 제주는 관광과 감귤산업의 번성으로 남부럽지 않은 부촌이었다.그러나 경기는 순환하는 것이어서,정체는 언젠가는 밀어닥치는 것이며 지금 제주는 그것을 맞고 있을 뿐이다.옛날에는 흉년이 들면 임금의 부덕 때문이라고 탓하기나 했지만,제주의 정체는 난국에 처한 세계경제의 여파가 제주를 엄습한 결과이니 특정인을 탓할 문제도 못 된다.따라서 문제는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의 태도 여하에 있다.

 ‘2005년 국제박람회’를 준비하는 나고야市의 일본도 경기침체에 빠져있고,내란으로 치달았던 1868년의 일본 현실도 어둡기만 했다.그런 상황 하에서도 그들은 보다 호전된 내일의 도래에 대비하여 미래를 준비했고,또한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주의 미래도 지금 준비되어야 할 것이다.원론적이고 선언적인 구상이 아닌,제대로 된 연구와 치열한 토론을 통해서 모든 비판과 반론에 견딜 수 있는 개조의 논리를 지금 준비하여야 한다.미래는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이규배·탐라대 교수·일본학>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