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06> 국민회의 특위안 파동

국민회의의 4·3특위 구성 결의안 제출에 4·3단체들이 강력 반발하고 있다고 보도한 「한라일보」 1999년 11월 19일자.

"총선 불리" 판단에 시간 벌기용 특위안 제출
 4·3진영 '공분'…연대회의 "즉각 철회" 성명

국민회의 특위안 파동
국민회의가 1999년 11월17일 소속 국회의원 101명의 발의로 난데없이 '4·3특별위원회 구성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 대목에서 '난데없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는 이미 국회에는 1996년 제주출신 변정일·양정규·현경대 의원 등의 주도 아래 여야 국회의원 151명이 발의한 4·3특위 구성 결의안이 계류되어 있었다. 그런데 국민회의가 이 결의안을 그동안 방치해오다 갑자기 별도의 결의안을 제출한 것이다. 둘째는 이 무렵 4·3연대회의 등 4·3진영이 한목소리로 국회 4·3특위의 효력이 매우 미미하기 때문에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완전히 묵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셋째는 국민회의 제주도지부가 하루 전에 발표한 4·3특별법안 시안 공개와 추진 의지와도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당 제주출신 국회의원들이 먼저 4·3특별법안을 공개한 후 여론의 따가운 화살을 받게 된 국민회의 제주도지부(지부장 김창진)는 심기일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자체적으로 특별법안 작업을 벌였다. 그리고 11월16일 16조로 이뤄진 4·3특별법안을 공개하고, 연내에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중앙당에 요청하겠다고 발표했다. 중앙당의 특위 구성 결의안 제출은 바로 이런 제주도지부의 행보에 찬물을 끼얹은 격이다. 

국민회의 중앙당의 내부 사정을 알아봤더니 당직자 사이에도 찬반이 갈리는 등 미묘한 분위기였다. 즉 임채정 정책위 의장 등은 특별법 제정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박상천 원내총무 등은 국회에 특위가 먼저 구성돼 진상을 규명한 다음 특별법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의견으로 맞섰다. 이 문제는 당론에 부쳐졌으나 당 8역회의에서 후자 안이 채택됐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총선 전략이 깔려 있었다. 이듬해 봄 총선을 앞두고 이념 논쟁의 선거 구도로 가면 국민회의 쪽에 불리하다는게 원내총무실의 분석이었다. 결국 이념논쟁의 휘발유성이 있는 4·3문제는 일단 국회 특위 구성으로 시간을 벌고, 총선 후 특별법 제정여부를 판단한다는 전략이었다.

4·3진영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토록 4·3문제 해결에 앞장서겠다고 공언한 DJ정부마저 그 해결의 단초가 될 특별법 제정문제를 놓고 주판알을 튕긴다면 자칫 4·3해결 보따리는 풀어보지도 못한 채 영구 미제가 될 개연성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4·3연대회의는 11월18일 '실효성 없는 4·3특위 구성안을 즉각 철회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당시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하던 필자가 이 성명을 직접 썼다. 성명은 "먼저 특위를 구성해 진상을 규명한 뒤 특별법을 제정하자는 수순의 4·3특위 구성안은 일응 논리에 맞는 것 같지만, 그 숨겨진 의도가 얼마나 정치적 제스처이고 허구임이 지나간 국회 4·3특위 구성의 역사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표현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제14대 국회와 제15대 국회에서 4·3특위 구성안을 어떻게 다뤘는지 조목조목 따졌다.

"설령 이번 국회에서 4·3특위를 결성했다고 가정하자. 생명력이 있는가? 국회의원들은 정기국회가 끝나자마자 총선을 향해 줄달음칠 것인데, 마음은 콩밭에 가있는 어느 국회의원이 그 짧은 기간에 4·3진상을 규명한단 말인가? 결국 16대 국회에서 다시 4·3특위를 하자고 떠넘길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성명은 따라서 다음 3가지를 촉구했다. 첫째 국민회의는 4·3특위 구성 결의안을 철회하고 4·3특별법을 제정할 것,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대선 공약이자 제주도민과의 약속인 4·3특별법 제정을 위한 특단의 조치를 취할 것, 셋째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정치적 책임을 물을 것이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강력히 투쟁해 갈 것임을 밝혔다. 

이런 공분의 화살은 곧이어 그동안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소극적인 제주도정에도 날아갔다. 당시 국회 차원에서 검토되던 제주 관련 특별법은 개발특별법과 4·3특별법 등 두가지였다. 제주도정은 개발특별법 통과에 온 힘을 쏟았다. 이른바 관변단체들이 개발특별법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고,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는 등 난리였다. 이에 비해 4·3특별법 제정 운동은 제주도 내의 진보인사들과 전국의 양심가 등 민간 차원에서 외롭게 투쟁하는 형국이었다.

4·3연대회의 상임공동대표였던 임문철 신부가 1999년 11월 17일자 「제민일보」에 투고한 칼럼 제목은 '개발특별법과 4·3특별법'이었다. 임 신부는 두가지 특별법에 임하는 제주도정의 자세를 신랄하게 지적한 뒤 "개발특별법 제정에 나서는 필사의 자세와 마찬가지로 (4·3특별법에 대해서도) 중앙정부와 국회를 설득하고 도민의 의사결집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해서인지 11월22일부터 시작된 제주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도 김영훈·김우남 도의원 등이 나서서 4·3특별법에 대한 제주도의 대처가 소극적이라면서 그 대책을 촉구하기도 했다. 

☞다음회는 '특별법 제정 상경투쟁'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