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10> 4·3특별법 심의 진통 ②


기점·용어 문제 충돌…대표단 설득에 승복
심사소위, 양당안 단일화해 전체회의 회부

4·3특별법 심의 진통 ②
1999년 12월6일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4·3특별법안을 심의하던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이 회의장을 박차고 나와 안쪽의 상황을 전했다. 다른 문제는 얼추 국민회의 안과 한나라당 안 사이에 문안 조정이 되고 있으나, 4·3의 기점 문제에 와서는 도무지 합의가 안돼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특별법안 제2조의 '정의'에 해당하는 것으로, 4·3사건의 기점을 국민회의 안에는 '1947년 3월1일'로, 한나라당 안에는 '1948년 4월3일'로 제안되어 있었다. 4·3연대회의는 국민회의 안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문제로 특별법 제정이라는 중대한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일이었다. 메모 쪽지를 회의장 안으로 들여보내 한나라당 변정일 의원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변 의원이 우리가 대기하고 있던 행자위원장 방으로 건너왔다. 필자는 변 의원에게 "1948년 4월3일 안을 그대로 고수할 것이냐?"고 따졌다. 변 의원은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순간 고성이 터졌다.

4·3범국민위원회 고희범 운영위원장이 "당신이 제주도 국회의원이 맞느냐?"고 소리친 것이다. 누가 만류할 겨를도 없이 "그런 법안을 만든 의도가 과연 4·3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것이냐, 공산폭동으로 몰고 가려는 것 아니냐?"고 속사포처럼 쏘아붙였다. 기자 출신인 고희범은 당시 외부 활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한겨레신문 광고국장을 맡고 있어서 4·3특별법 제정운동에 열정을 쏟고 있었다.

나름대로 4·3특별법 제정을 위해 노력하던 변 의원은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필자는 고조된 분위기를 진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변 의원에게 4·3 기점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했다. 변 의원은 이에 대해 "시간을 달라"고 말했다. 결국 그날의 법안심사소위는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다음날 오전에 속개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그날 밤 변 의원이 필자에게 연락을 해왔다. '1947년 3월1일' 안을 수용하겠다는 것이었다. 뛸 듯이 기뻤다.

여기서 잠시 4·3 기점의 중요성을 간단히 설명하겠다. 그 무렵 4·3 연구자들은 4·3의 발단을 1947년 3월1일 경찰 발포사건으로 보고 있었다. 경찰 발포사건에 항의, 3월10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가자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청을 파견해 물리력으로 제압했다. 따라서 4·3의 원인을 보면 '외부 세력의 탄압에 대한 저항'이라는 성격이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도외시하고 사건의 시점을 1948년 4월3일로 설정했을 때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뜬금없이 발생한 '공산폭동'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었다.   

변 의원의 답변에 한숨 돌린 상경대표단은 마포에 있는 한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경비를 절약하느라 찜질방을 숙소로 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필자는 다음날 일찍 국회로 변 의원을 찾아갔다. '어제의 소동'에 대해 양해도 구하고, 기점 문제를 수용해 준데 대해 고마운 뜻을 표하고 싶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바탕 붙고 말았다.

변 의원은 한나라당 안과 국민회의 안을 조합해서 4·3사건의 정의를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을 말한다"로 정리하겠다고 말했다. 국민회의 안에 있었던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밑줄 친 부분)이란 용어를 빼 버린 것이다. 아직 진상규명이 안된 상태이기 때문에 '주민 희생' 등이 법률적 용어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내 입에서 "당신 제주도 국회의원이 맞느냐?"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4·3의 심각성은 '주민 희생'에 있고, 그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일이 아니냐고 따진 것이다. 몇 마디 옥신각신하다가 변 의원이 그마저도 수용하겠다고 승복했다. 순간순간 고비를 넘기는 기분이었다.

이어 추미애 의원을 만났더니, 중요한 기점 정의 문제에 가닥이 잡혔으니 다행이라면서, 오늘 심사소위에서 양당이 각자 주장하는 안이 합의가 안되면 빼서라도 법안 통과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즉, 4·3재단의 설립(국민회의 안), 추념일 제정 및 재심 규정(한나라당 안) 등이 누락될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걸 빼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자, 추 의원은 오늘 합의가 안되면 국회 일정상 이번 정기국회에서 법안 통과가 물 건너갈 수 있다면서 "일단 법만 제정하면 나중에 개정을 통해 그런 내용을 반영할 수 있다"고 다시 설득했다.

결국 국회 행자위 법안심사소위는 12월7일 양당이 각각 제출한 4·3특별법안을 행자위 자체법안으로 단일화해서 전체회의에 회부하기로 했다. 중요한 관문은 통과했지만, 그 과정에서 앞에서 밝힌 3개 조문은 사라지고 말았다.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 등 23개 보수단체가 4·3특별법안을 폐기하라고 성명을 발표한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다음회는 '보수단체 반발과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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