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양조훈 육필기록] <113> 4·3특별법 본회의 통과 ②

1999년 12월16일 4·3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는 순간 TV 실황중계를 보던 4·3연대회의 임원들과 관계자들이 만세를 부르며 기쁨을 나누고 있다. <KBS-TV 화면>

상정 29일만에 본회의 통과 "기적같은 일"
장벽 부닥칠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 도움

4·3특별법 본회의 통과 ②
1999년 12월16일 4·3특별법안이 상정된 국회 본회의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반대 토론에 나선 김용갑 의원이 '역사에 대한 범죄'라는 과격한 용어까지 써가며 4·3특별법안을 통과시켜선 안된다고 강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나라당 원내대책회의에서 '반대 토론은 하되 표결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했기 때문인지 김용갑 의원은 발언대에서 내려오더니 곧바로 본회의장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박준규 국회의장이 "또 다른 의견이 있느냐?"고 묻자 약간의 웅성거림이 있었다. 박 의장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가결됐음을 선포합니다"며 의사봉을 힘차게 두들겼다. 이때 국회 본회의장에 걸린 시계는 오후 3시2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순간 4·3연대회의 사무실에서 초조한 마음으로 TV 실황중계를 지켜보던 연대회의 임원들과 관계자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어떤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50년 맺힌 한을 풀 수 있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특별법 제1조)을 목적으로 하는 제주4·3특별법은 이렇게 탄생됐다.

필자는 4·3특별법안의 국회 통과 직후 '기적같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특별법 통과 과정에서 도저히 뚫기 힘들 것 같은 장벽에 여러번 부딪혔지만 그때마다 신기하게 실마리가 풀렸다. 마치 보이지 않은 손이 도와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4·3특별법 제정 작업은 뜻있는 제주도민들과 전국의 양심있는 인사들이 뜻을 모아 '쟁취해낸'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았다. 그 밑바탕에는 4·3범국민위, 4·3도민연대, 4·3연대회의 등으로 상징되는 4·3진영의 치열성과 헌신성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담아낼 수는 없다. 필자가 '기적같은 일'이라면서 '신기하게' 느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정치적인 상황이었다. 우선 DJ정부의 탄생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국회는 여소야대 상황이었다. 만약에 여당인 국민회의가 먼저 4·3특별법을 치고 나갔더라면 야당인 한나라당은 어땠을까? 또한 다수 의석을 갖고 있던 한나라당이 법 제정을 반대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데 4·3특별법안은 오히려 이해 10월11일 한나라당 제주출신 세 국회의원이 전격 발표하면서 시동이 걸렸다.

둘째는 대통령의 결단이다. DJ는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4·3특별법 제정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여당의 총선 전략에 의해 특별법 제정은 뒷전으로 밀렸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DJ는 4·3진영 대표단과 극적 면담을 가진 청와대 민정수석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결단을 내려 특명을 내린 것이다. DJ가 "정기국회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는 대목에서 그 의지가 엿보였다.

셋째는 법안 제정의 속도다. 한나라당이 4·3특별법안을 국회에 발의한 것은 11월18일이다. 그리고 국민회의가 대통령의 특명으로 입장을 선회해서 특별법안을 발의한 것이 12월1일. 이 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 12월16일이니 한나라당이 처음 발의한 때를 기준삼아도 29일만에 거둔 성과였다. 쟁점이 되는 법안이 이렇게 빨리 제정되기는 매우 드문 일이다. 법안 심의과정에서 혼선과 긴박했던 상황들이 있었지만, 법을 꼭 제정해야 한다는 한나라당 변정일 의원, 국민회의 추미애 의원 등의 의지와 열의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게 했다.

넷째는 보수단체의 뒤늦은 반발이다. 4·3특별법안에 대해 23개 보수단체들이 첫 반응을 보인 것은 12월8일이다. 그들은 성명을 발표하고, 4·3특별법안을 즉각 폐기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시점은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서 여야 합의로 특별법 대안을 만든 이후였다. 결국 보수단체들은 뒷북을 친 격이다.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여당 원내총무 등이 4·3특별법이 아닌 국회 4·3특위로 밀고 갔던 것이 그들을 방심케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4·3특별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각계의 환영 성명이 잇따랐다. 4·3연대회의와 4·3범국민위가 공동으로 환영 성명을 발표했고, 한나라당 제주도지부, 국민회의 제주도지부, 제주도의회 4·3특별위원회, 4·3희생자유족회 등이 잇따라 성명을 발표했다. 지역 언론들도 "50년 맺힌 한 푸는 새 역사의 장 열다", "특별법 제정은 도민의 위대한 승리" 등의 제목을 달고 대서특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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