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주파(派)’] 8.서양화가 김용기

8년여 전 제주시 도두동에 둥지…계속적인 작품 활동으로 '제주'품어
'선'에서 면, 바람 담는 법 등 드러나, 지역과의 교류 강한 의지 표현

'선'을 그리던 작가가 바람을 만났다. 마치 운명처럼. 우연히 더듬게 된 제주시 도두동 마을 밖 길에서 탁 트인 바다를 만났고, 제주서 살자고 생각 없이 던진 말이 현실이 됐다. 역시 운명이다.
그렇게 8년, 제주와 부대낀 화가는 제주를 닮아갔다. "작업하는 스타일은 쉽게 변하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했지만 작업실 여기저기 제주서 만난 인상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 서양화가 김용기씨.
# "차나 한 잔 하게나"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일은 늘 가슴이 설레고 조심스럽다. 찾아가도 되겠냐는 전화에 성큼 "차나 마시러 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제주 살이 8년차. 지역에서 일부러 자신의 작품 세계를 파헤치려는 의도가 없음을 알고도 남을 만큼 살았다. 아직도 어렵고 모르는 게 더 많은 제주지만 언제나처럼 마음을 열 준비가 돼 있다는 표현이다.

김용기 작가(60)에게 제주는 운명처럼 시작됐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지금의 제주 살이는 없었다. 꼬박 9년 전 지인을 만나러 왔다 우연찮게 지역 사람들조차 잘 다니지 않는 마을 외곽 길을 걷게 됐다. 숨이라도 돌릴 생각에 돌아본 곳에 푸른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과 맞닿은 곳이 어딘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푸른  색이 묘하게 엉켜있는 느낌에 탄성대신 "우리 여기서 살까"하는 말이 나왔다. 늘 옆을 지켜주던 아내 역시 "그러자"했다. 기대도 않았던 아내의 대답에 김 작가는 '제주행'을 감행했다.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김 작가가 길을 잃고 바다를 만났던 곳에 김 작가가 지불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책정된 '조각 땅'이 있었고 그 곳에 작업실을 겸한 작은 펜션을 지었다. 유화 작업은 지하실에서, 아크릴이며 다른 작업은 펜션 입구 의 작은 공간을 활용한다. '딸랑'하는 종소리에 물감이 잔뜩 묻은 작업용 앞치마를 한 주인장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함이 있다.

제주에서 작업을 하면서 쉬운 일이라곤 없었다. 뜻하지 않게 1년여 투병생활을 해야 했고, 제주를 만만히(?) 어겼던 탓에 습기로 보관하던 작품 중 일부를 잃는 시해착오도 겪었다. 그러면서도 세 차례나 개인전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제주가 아닌 서울에서 진행됐다.

▲ 김용기 작 ‘만선’
# 필요하다면 늘 '환영'

제주에 살면서도 여전히 제주가 낯설었던 때문이다. 작가에서 전시는 생활과 마찬가지인데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는다면 그 의미를 놓치기 쉽다. 타 지역에 비해 전시 문화가 활발하지 않은 것이 늘 아쉽다.

그래도 제주에서 얻은 것은 늘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기자와 차를 마시면서도 작가는 어제 그린 그림 얘기에 화색이 돈다. 생각처럼 되지 않아 내팽기다시피 뒀던 그림이 저절로 마르며 자신의 소리를 냈다. 바람에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한 오름 능선의 나무 무리가 일렁이고 하얀 말 몇 마리가 노닌다. 예전 같으면 크로키 하듯 표현했을 것을 그림이 마르는 속도를 따라가려다 보니 단순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느낌이 싫지 않은 눈치다.

▲ 작업실 모습.
제주에 살면서 변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예전에는 치열할 만큼 삶의 그늘이 덕지덕지 묻어났던 소재들이 제주에서는 풍요로워지고 밝아졌다.

틈틈이 도내 전시장을 돌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도 했지만 늘 모자라다. 그런 작가의 시선은 이제 지역으로 향한다.

김 작가는 "필요하다면 학교 연계 프로그램 등에 참여하고 싶다"며 "몰라서 찾지않는 것은 몰라도 알아서 찾는다면 늘 환영"이라고 말했다. 고 미 기자 popmee@je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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