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20> 보수진영의 헌소 제기

서청·학련 출신 앞장…성우회까지 가세
청구인 변호인단에 대법관 출신도 포함

보수진영의 헌소 제기

2000년 5월10일 정승화(전 육군 참모총장) 성우회 회장 등 예비역 장성 출신 333명이 "4·3특별법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제출한 헌법소원심판 청구서

2000년 4월6일 보수 인사와 예비역 장성 출신 등 15명이 제주4·3특별법이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이들은 "제주4·3사건은 공산무장반란인데, 4·3특별법은 가해자인 공산무장 유격대를 피해자인 경찰·양민들과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위령토록 규정, 헌법의 자유주의적 기본질서를 위반하고 평등권 등을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위헌심판을 청구한 것이다.

이들 청구인들 중에 눈길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다. 4·3 당시 서북청년회(서청) 중앙회장을 맡았던 문봉제, 전국학생총연맹(학련) 중앙위원장이었던 이철승, 박진경 연대장의 양자 박익주씨 등이었다.

4·3 당시의 서청은 제주도민들에게는 '악몽'으로 각인되어 있다. 이승만 정권 시절 교통부장관을 지낸 문봉제씨는 4·3 진상규명이 사회문제로 부각되던 1989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제주에서의 진압은 미군정 하의 군인과 경찰이 한 것"이라고 발뺌하면서 "제주에서의 서청의 공과는 공반과반(功半過半)"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그런 장본인이 헌소 청구인으로 나선 것이다.

국회의원 7선 출신인 이철승씨는 1970년대 DJ·YS와 더불어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벌였던 인물이다. 그가 4·3 당시 중앙위원장을 맡았던 학련 역시 제주도에서는 그 잘못이 회자되는 집단이다.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 자격으로 헌소 청구인에 참여한 그는 이에 앞서 3월20일 한나라당 서울 광진을 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 "4·3특별법은 4·3폭동을 정당화·합리화시키고 폭동 주동자들을 명예 회복시키려 하는 법"이라고 포문을 열었다. 독자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웬 4·3특별법 비난?'이라고 의아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발언은 바로 이 지역구에 출마한 민주당 추미애 의원을 겨냥한 것이었다.

박익주씨는 육군 중장 출신이다. 제11·12대 국회의원(민정당)도 지냈다. 그는 4·3 당시 제주에서 부하에 의해 암살당한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의 양자이다. 그는 양부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준장 추서 운동도 벌였지만 성사시키지는 못했다. 그는 4·3특별법이 제정되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반대운동에 나선 것이다.

이렇게 헌법소원심판 청구인 가운데 서청·학련 관련자까지 참여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제주사회는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상임대표 임문철·김태성)는 4월10일 성명을 발표하고 "서청·학련 책임자 등이 위헌소원을 낸 것은 학살 책임자들과 극우세력의 최후의 몸부림이자, 사건의 진상이 공개되면 그 반인륜적 죄악상이 만천하에 공개될 것을 우려하는 위기의식의 발로"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런 논란의 와중에 2000년 5월10일 예비역 장성 출신 모임인 성우회(회장 정승화)가 헌법소원심판 청구에 가세하면서 4·3특별법의 위헌 논쟁은 더욱 확산되었다. 장성 출신 333명이 서명한 성우회의 헌소 청구서에는 "4·3특별법은 청구인들의 기본권과 행복추구권 등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4·3사건은 남로당이 1948년 한반도를 적화하기 위해 제헌의원 선출을 저지할 목적으로 일으킨 폭동임에도 특별법은 이를 합법화해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파괴했다"고 지적하고 "국무총리 산하에 위원회를 둬 희생자의 심사결정, 명예회복, 호적 등재까지 자의로 할 수 있게 한 조항은 포괄위임 입법금지 원칙을 위배했다"고 주장했다. 성우회는 특히 "특별법은 폭동세력과 국가공권력을 대등하게 위치시켜 공권력 행사의 적법성을 부인하고 있다"면서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청구인측 변호사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 10여명에 이르렀다. 대법관 출신인 정기승, 국회의원 출신인 나석호·이진우·이택돈 변호사 등도 합류했다. 그 중에도 4·3특별법 제정을 공박하는 「월간조선」 기고문의 파문을 일으켰던 이진우 변호사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청구인측 변호사들은 준비서면을 작성하면서 4·3특별법의 문제점의 출발점은 4·3사태의 기산일을 1948년 4월3일로 하지 않고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잡은데 있다고 지적했다. "그것은 목적의식의 소산이며, 그 목적이란 적화통일을 목표로 한 공산주의 폭동에 대하여 조국의 광복을 위한 민족의 3·1 저항운동과 같은 평가를 하기 위한 것"이란 색다른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에 맞서 행정자치부 고문 변호사인 배병호 변호사가 반론을 폈다. 정부나 국회, 4·3 진영까지 한편이 되어 청구인 측의 부당한 주장에 반박하는 논리를 폈고, 관련 자료를 제공했다.

2000년 12월8일에는 청와대와 국무총리실·행정자치부·법무부·국방부 등 정부 측과 국회 측 관계관 연석 대책회의도 개최됐다. 결국 헌법재판소는 두가지 헌법소원 심판 청구를 병합 심리한 끝에 2001년 9월27일 위헌심판 청구를 각하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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