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시행령 둘러싼 파동②

▲ 2000년 4월17일부터 제주4·3연구소에서 4·3특별법 시행령안 개악에 항의하는 농성이 시작됐다. 박창욱 유족회장이 농성장에서 경과를 설명하는 모습.
시행령 반대 주장하며 무기한 항의농성
여권, 전향 검토 약속해놓고 '조건부 의결'

시행령 둘러싼 파동②

2000년 4월7일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제주도내 33개 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4·3특별법 시행령안 개악에 따른 긴급 합동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존의 4·3연대회의에 참여했던 24개 유족 및 시민사회단체 이외에도 도내 4개 대학 총학생회 등이 가세하면서 참여 단체수가 늘어났다.

이들 단체 대표는 합동 기자회견을 통해 제주도민의 의견을 묵살한 행정자치부의 무책임한 처사를 성토하고 다음 네가지 요구사항을 발표했다. 첫째 왜곡된 보고서 작성자 문책, 둘째 시행령 상의 4·3위원회 20명 중 국방부장관·국무조정실장·법제처장·군사전문가는 조문에서 삭제, 셋째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15명 중 국방부장관·국무조정실장·법제처장이 정하는 자와 군사전문가는 조문에서 삭제, 넷째 진상조사작업을 수행할 민간 상임 전문위원 약간명을 두는 규정 신설 등이었다.

이들 단체는 "이같은 최소한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4·3특별법에 근거한 각종 위원회 및 기획단 참여를 전면 거부하고 전도민적 투쟁을 전개할 것임을 경고한다"고 밝혔다. 이들 단체가 이렇게 강공으로 나간 것은 중앙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장부터 밀리기 시작하면 4·3특별법의 입법 취지가 상당히 훼손되고 사사건건 발목이 잡힐 우려가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들 단체는 행자부의 태도 변화의 배후에는 국방부가 있다고 봤다. 당초 입법예고 당시 시안에 없던 국무조정실장을 끼워 넣어 공무원 숫자를 늘리고 심지어 군사전문가까지 조문에 명시하면서도 제주도내 단체들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한 것은 국방부의 강력한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본 것이다.

공권력 집행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과거의 과오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이 특별법 진상규명 기구 구성에 집착하는 국방부의 의도는 무엇인가? 제주도내 단체들은 그것은 한마디로 기존의 틀을 바꾸지 않고 과거의 이념논쟁으로 끌고 가려는 속셈이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는 4월13일 4·3특별법 시행 예정일을 앞두고 시행령을 확정 발표할 계획이었다. 이런 일정에 따라 4월10일 관계부처 차관회의를 열어 시행령안을 의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내 4·3유족과 시민사회단체의 완강한 반발에 부닥쳐 이를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4월13일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코앞에 둔 여야 국회의원 후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이 문제가 정치권으로 확산되었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할 것 없이 제주에서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은 잇따라 제주도청 기자실에 찾아가 시행령안의 변질을 성토하기에 바빴다.

33개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4월11일 회합을 갖고 4·3특별법 시행령 개악안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별도 대책기구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시행령은 법 제정 취지에 맞게 관료 중심의 현행 개악안을 철폐하고 진상규명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민간 전문가 중심의 실무기구 구성이 관건이라고 보고 이를 관철하는데 초점을 맞춰나갔다. 이에 대한 강력한 의사 표시로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항의 농성은 4월17일부터 제주4·3연구소에서 시작됐다. 농성 참여자들은 "50여년의 한을 털어내기 위해 지난해 말 어렵게 제정된 4·3특별법에 따른 최종 시행령안을 검토한 결과 올바른 진상규명을 바라는 도민의 바람을 외면한 내용으로 확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면서 "시행령안의 개악을 막기 위해 농성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제주도민들의 강력 항의에 여권 수뇌부가 전향적 검토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제16대 총선에서 제주도에서는 현경대(한나라당)·장정언(민주당)·고진부(민주당)가 각각 당선됐다. 4월18일 청와대에서 열린 민주당 당선자 초청 만찬에 다녀온 장정언 당선자는 다음날 "여권 수뇌부로부터 4·3특별법 시행령에 제주도민들의 의사를 적극 반영, 군사전문가를 삭제하도록 하겠다는 확약을 받았다"고 밝혔다. 즉 민주당 이재정 정책위 의장, 김옥두 사무총장, 한화갑 지도위원 등이 전향적인 검토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4월20일 최재욱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열린 차관회의에서 4·3특별법 시행령안은 수정되지 않은 채 조건부로 의결됐다. 즉 논란이 되는 조문은 4월25일 열리는 국무회의 때까지 정부 각 부처의 의견을 수렴해 시행령을 확정한다는 내용의 어정쩡한 조건부였다.

이에 제주도내 단체들이 발끈했다. 제주도내 단체들은 차관회의에서 도민들의 의견이 수렴될 것으로 예상하고 농성을 풀 예정이었다. 그러나 차관회의 결과를 듣고 22일 제주시청 어울림마당에서 이를 성토하는 장외 집회를 개최하는 등 농성 강도를 더욱 높여가기로 했다. 한편 장정언 국회의원 당선자 등은 별도의 강공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음회는 '시행령 둘러싼 파동' 제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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