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이 진행될 무렵인 루이 16세 때,‘밀가루 폭동 사건’이 있었다.빵집이 습격을 받고,시장에서 파는 빵을 강탈해 가는 일이 빈번했다.덩달아 빵과 밀가루 값이 폭등하고,품절 현상이 지속됐다.주부들이 시위를 벌이며 베르샤유 궁전으로 몰려가 “밀가루 값을 내려 달라…빵을 달라”고 외쳤다.그러자 여왕 앙트와네트는 “왜 저 사람들은 빵만 달라고 할까.과자나 고기를 사먹으면 될 것을…” 하고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렸다.

 며칠 전 자리에서 물러난 여당 대표는 12월 초,서울 시내 시장 한 귀퉁이를 돌아보고 나서,‘옷가게 주인은 경제가 어렵다 했지만,빵집 주인은 먹고 살 만하더라’고 말했다 한다.대통령은 ‘체감 경기가 대단히 나쁜 것은 사실이지만,경제는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이라 했다.두 사람의 말은,국민들의 현실적 ‘체감 온도’를 갈파하지 못하고 있거나,국민들의 고통을 진솔하게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발언이다.국민들의 쓴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다면,현 정권의 무지·무능함을 뜻한다.

 농민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인 적이 있다.제주도 농촌 실정도 마찬가지다.제주섬의 ‘빵’이라 할 수 있는 밀감,당근,감자,콩,채소를 재배해도 농약 값도 건지지 못해 울상들이다.봉급 생활자들의 정서도 이들과 다를 게 없다.국가 재정이 어렵다며 봉급을 깎고,국민연금과 의료보험료를 인상하고 있다.더욱 큰 문제는 하루 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나고,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실직자와 고등실업자가 늘어가는 데 있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그러나 가난 구제의 묘책은 나라가 내놓아야 한다.조삼모사(朝三暮四) 식으로 국민의 혈세를 거둬들여 ‘밀가루’나 ‘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밀알’을 가꾸며 신명나게 땀 흘릴 수 있는 ‘텃밭’을 마련해 줄 책임이 있다.국민의 생활 환경과 삶의 질은 정치·행정에 의해 좌우되는 까닭이다.특히 한국의 정치권은 아직껏 산업,경제에서부터 교육과 사회,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정치권이 ‘태풍의 눈’으로 자리잡고 있다.정치·행정가가 국민이라는 대식솔을 거느린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들이 꿈꾸는 가장다운 ‘가장(家長)’이 없다.밥 달라고 아우성치는 자식들을 위해 매품팔이로 나서는 연흥부와 같은,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나,도덕적 속죄 의식을 가진 사람이 없다.권력의 그늘에서 맴돌며 대통령에게 충정을 맹세하는 정치꾼,차기 대권을 꿈꾸는 몽상가들은 득실거리는데,불편부당한 입장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충성을 다짐하는 정치가는 없다.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나선 지방의회 의원들까지도 민중의 고통을 외면한 채,개인의 명예나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땅바닥에 엎드려 도민과 지역 주민들의 몸종이 되겠다고 자처하던 사람들은 ‘철새’가 되어 날아가 버린 2000년 겨울이다.

 지난 12월16일 제주도를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은,“우리 경제의 제일 큰 마이너스 요인은 심리 문제”라고 하면서 “국민들이 불안해 하면,좋은 정책도 안 믿게 되고,실천이 안 되며,열심히 일도 안 하게 된다”고 했다.그러나 ‘마음의 병’의 요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민초들의 가장 큰 마음의 병은,‘빵’ 문제뿐만 아니라,믿음의 상실에 있다.그 만큼 치유책이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날아가는 꿩 잡으려 말고,잡은 꿩부터 잘 기르라’는 제주 속담도 그 해법의 화두가 될 듯싶다.<고시홍·소설가·서귀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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