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4·3위원회 구성 논란

2000년 8월28일 그날 위촉된 4·3 중앙위원들과 제주도 각계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4·3위원회 현판식. 조성태 국방부장관, 최인기 행자부장관도 참석했다.

"이진우 위촉, 위원수 19명" 지시 철회시켜
 각 분야 중추인물로…현판 달고 본격 출범

4·3위원회 구성 논란
제주4·3특별법에 의한 최고 의결기구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다. 그 산하 조직으로 진상조사와 조사보고서 작성을 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위원회의 의결사항을 실행하기 위하여 제주도지사 소속 아래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를 두도록 했다. 또 사무기구로 행정자치부 산하에 '제주4·3사건처리지원단', 제주도 산하에 '제주4·3사건지원사업소'를 각각 설치, 운영하도록 했다.

이들 기구 중 2000년 3월3일 행자부 소속으로 4·3지원단이 맨 처음 발족했다. 처음엔 행자부에서 파견한 행정고시 출신 박동훈 서기관(현 행자부 지방행정국장)과 제주도에서 파견한 2명 등 3명의 공무원이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그해 6월 김한욱 제주도 기획관리실장이 초대 단장으로 부임했다. 지원단 정원은 몇차례 조정이 있었는데 많을 때는 21명이나 되었다. 지원단 발족 초기 애를 먹었던 것이 바로 위원회와 기획단 인선문제였다.

위원회의 구성은 특별법 시행령 상 20명 이내의 위원으로 하되, 위원장은 국무총리, 당연직 위원은 법무·국방·행정자치·보건복지·기획예산처 장관과 법제처장, 제주도지사가 맡도록 했다. 나머지 위원 12명은 민간인으로 구성하게 됐다. 특별법과 시행령이 제도적 장치를 만든 것이라면, 진상조사 등의 성패는 어떤 능력과 성향의 사람들로 위원회를 구성하느냐는 인선문제에 달렸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4·3진영과 보수진영은 눈에 보이지 않은 각축전을 벌었다. 그 틈새에 끼인 것이 지원단이었다. 지원단은 이처럼 첨예하게 입장을 달리하는 진영뿐만 아니라 행자부-국무총리실로 이어지는 '상전'을 모셔야하는 처지여서 이래저래 곤혹스런 입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민간위원 위촉은 공정성과 객관성을 확보한다'는 원칙 아래 학계와 4·3관련단체, 군·경측에서 각각 3명씩, 법조계·언론계·시민사회단체에서 각각 1명씩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때부터 각 진영은 자기들의 입장을 대변할 인물을 포함시키기 위해서 신경전을 벌였다. 그들은 해당 단체에서 어떤 성향의 인물을 추천하는지 정보를 파악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던 차에 그해 7월에 이르러 4·3진영에 뜻밖의 정보가 입수됐다. 총리실에서 행자부에 ①이진우 변호사를 4·3위원으로 위촉할 것 ②위원회 숫자를 20명에서 19명으로 줄여 민간인 비중을 줄일 것을 지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이진우 변호사는 누구인가? 그해 2월 「월간조선」에 '국군을 배신한 대한민국 국회'란 제하의 기고문을 통해 4·3특별법 제정 자체를 통렬하게 비난했던 장본인이 아닌가. 민간인 1명을 줄여 19명으로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면 벌써 가부 표결까지 의식한 발상이 아니냐는 게 4·3진영의 시각이었다.

DJ정부가 출범했지만 성격은 JP와의 공동정부였다. 당시 국무총리는 보수정당인 자민련 출신의 이한동 총리였다. 이진우 변호사는 바로 그 자민련의 국회의원 공천 심사위원장을 맡았었다. 이런 뜻밖의 구상은 그런 인연을 발판으로 보수진영에서 한 것 같은 인상이 짙었다. 

당시 4·3진영에서는 위원회 인선문제 등에 4·3범국민위 고희범 운영위원장이 발벗고 뛰고 있었다. 그가 이 소식을 듣고 청와대 김성재 수석-윤석규 행정관 라인과 국회 추미애 의원 등과 긴밀히 협의하면서 대책을 모색했다. 그는 총리실 안이 강행됐을 때는 4·3유족과 단체들이 전면 보이콧하는 상황에 이를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결국 청와대가 나서서 총리실을 설득, 이 방안은 철회됐다.

난고 끝에 4·3위원회 민간인 위원 선임은 그해 8월에 이르러 가닥이 잡혔다. 학계 강만길(상지대 총장)·서중석(성균관대 교수)·신용하(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 4·3단체 김정기(서원대 총장)·박창욱(4·3유족회 회장)·임문철(신부·4·3도민연대 공동대표), 군·경 김점곤(예비역 소장)·이황우(동국대 행정대학원장·경찰학회장)·한광덕(예비역 소장·전 국방대학원장) 위원이 각각 추천됐고, 언론계 김삼웅(대한매일 주필), 법조계 박재승(변호사), 시민사회단체 이돈명(변호사·참여연대 고문) 위원도 추천됐다.

2000년 8월28일 4·3위원회 민간인 위원 위촉식과 1차 회의가 중앙종합청사 국무총리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위원들은 곧바로 종로구 통의동 코오롱빌딩으로 옮겨 제주에서 올라간 각계 대표들과 함께 4·3위원회 현판식을 가졌다. 4·3위원회가 발족하기까지 수차례의 험난한 고비가 있었지만, 위원들은 다른 어떤 과거사 정리위원회보다 각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중추적인 인사들로 구성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음회는 '4·3기획단 구성 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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