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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위안부들 울고넘던 아카섬 아리랑 고개 눈물적신 '아리랑'[제주4·3을 기리는 오키나와에서]<하>
허영선
입력 2012-04-08 (일) 15:54:44 | 승인 2012-04-08 (일) 15:54:44

   
 
  제주의 안복자 명창(왼쪽)이 아리랑 고개에서 아리랑을 부르자 위안부들에게 '아리랑'을 배웠던 신죠 요시코 할머니도 따라부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1.
오키나와의 아주 작은 섬, 절해고도. 아카시마(阿嘉島)를 아시는지요. 이 섬의 아리랑 고개를 아시는지요. 너무나 아름다워서 용궁섬 같다고도 했다지요. 아카섬으로 가는 길은 오키나와 본토에서 2시간의 뱃길. 기막히게 아름다운 옥색의 바다를 건너야합니다. 태평양전쟁 말기, 억울하게 남의 땅에서 죽어간 청춘들. 조선인 군부와 조선인 위안부들의 슬픈 넋이 떠다니는 섬이지요. 이 섬에서 그들의 넋을 기리기위한 의미있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아카섬 평화제실행위원회(위원장 金城 弘昭)가 주최한 제3회 아카섬 아리랑 평화음악제(25일)와 오키나와전 67주년 아카섬 합동위령제(26일)가 그것이지요.

2.
아카섬. 온종일 까마귀 소리가 한공을 베고, 낮에 피는 나팔꽃이 활짝활짝, 붉은 부겐베리아와 하얀 띠꽃(새)이 나풀나풀 폐허가 된 집터에서 자라고 있는 섬. 300여명 섬사람이 오밀조밀 살아가는 이 섬에 오디열매가 붉게 익었습니다.

 이 섬의 아리랑고개로 가는 길. 오키나와 위안소는 121개소. 아카섬에는 조선인 위안부 일곱명이 1944년 11월에 연행돼 왔습니다. 이들중 오키나와 본토에서 6명은 전쟁중 죽거나 전후 행방불명되거나 했지요. 마을에는 네명, 세명의 젊은 그녀들이 살았다는 두 채의 집이 한울타리에 있습니다. 하얀 색으로 칠해진 작고 낮은 지붕아래서 그들의 고독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3.

   
 
  조선인 위안부들에게 밥을 해주었다고 증언한 키쿠에 할머니.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를 만났던 아카섬의 두 여자를 만났습니다. 고령의 신죠 요시코(78)와 카네시마 키쿠에(87) 할머니. 요시코 할머니는 당시 열 살. 조선인 위안부들의 집과 가까운 곳에 살았지요. "초등학교 4학년때지요. 제가 아리랑을 부르면 잘한다 잘한다 했어요. 오키나와말을 쓰면 간첩이라고 했어요. 군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 없었지만 가까이 가봤어요. 어른들도 가까이 가지말라고 했지만 갔어요. 나는 가고 싶어서 갔어요. 조센삐 조센삐했어요. 의미는 몰랐지만. 그렇게 부르고 있었어요. 어린애였기 때문에 몰랐어요. 같은 여자로서 너무 슬픈 일이지요. 그건 정말 야만적인 일이지요."

 키쿠에 할머니. 그녀는 당시 스무살. 위안부들에게 밥도 해주고 왔다고 합니다. "제일 큰 언니가 스물여덟살이고 제일 작은 언니가 마치코, 18살이었습니다. 아이를 고향에 둔 사람도 있었지요. 열여덟살 짜리 언니는 일본어도 몰랐어요. 술을 먹으면서 그런 말을 많이 했죠. 고향에 가고 싶다고. 감자볶음 같은 반찬, 쌀, 그런 것은 부대에서 주었어요. 근처 사람들이 심어 놓은 파와 자연 야채를 돼지고기 넣고 볶은 기름된장에 밥이랑 볶아서 먹고 있었어요."

4.
고개 넘으면 또 고개인 아리랑 고개. 우리 조선인 위안부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넘던, 슬픈 사연이 깃든 곳이지요. 예전에 논밭이었고, 사슴도 뛰어다닌다던 이 고개. 조선인 위안부들이 먹을 풀을 뜯으며, 고개를 넘어가던 이 곳은 지금 무성한 억새와 푸른 덤불숲으로 휘덮여 있습니다.

 "가자 가자 어서가자/백두산 덜미에 해 저물어간다/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느냐/ 날두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느냐…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 고개에서 또 한번 눈물바람이 한바탕 흩뿌려졌습니다. 3년전 이 섬을 처음 찾았던 날, 위안부들 사연에 가슴이 미어졌다는 제주의 안복자 명창. "시신을 모시고 오진 못하지만 영혼이라도 조국으로 같이 모시고 가고 싶은 마음"이라며 그녀가 즉석 아리랑을 부르면서였습니다. 주저앉아 무릎끓어 눈물 닦는 일본 여성들, 동행했던 재일의 김시종 시인 눈에서도, 섬 밖에서 온 100여명의 참가자들도 눈물을 닦았습니다. 위안부에게서 아리랑 노래를 배웠다는 신죠 요시코 할머니는 내내 '아리랑'을 따라부르며 목메어 했습니다.

5.

   
 
  아카섬의 조선인 위안부가 살았던 현장에서 당시를 설명하는 나가타 이사무 한라산회 고문.  
 
나가타 이사무. 이 행사를 주관하는 핵심이며, 제주4·3을 생각하고 배우고 행동하는 모임 '한라산회'의 고문인 그는 줄기차게 오키나와 전에서의 조선인 군부, 조선인 종군 위안부를 현지답사를 통해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참석한 일본인들을 향해 1시간동안 오키나와전과 아카섬의 학살을 이야기했습니다.

 "조사하면 모순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현장에 가서 현지조사를 해야합니다. 오키나와전은 문헌만 보면 잘못된 기록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과서만 보면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아카시마는 1945년 3월26일 8시4분 미군이 처음으로 상륙하였던 섬, 오키나와전의 출발이자 이 전쟁의 축소판입니다. 오키나와 점령 제1호가 아카시마. 아카시마 미군지배가 시작됐습니다. 결7호작전으로 제주도가 희생될 뻔했습니다." 하여, 제주4·3과 오키나와 3·26전쟁은 바로 '평화'를 지키고 어떻게 역사적 과제를 헤쳐나가야 할지를 보여준다는 것이지요.

 이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려는가. "오키나와에도 4·3사건이 있습니다. 심방을 통해서 그런 위령제를 지내려고 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언제까지나 우리는 사죄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조선반도에서 강제적으로 여기까지 와서 그들이 왜 죽어야했을까, 넋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었으면 합니다."

 평화음악제는 그런 마음으로 열렸습니다. 대금의 이광훈이 한오백년을(가야금 서향주, 장구 홍석령), 제주의 무용가 김희숙이 영혼을 위무하기 위한 '검무'로 박수를 받았습니다, 안복자 명창이 애절함을 담은 '봉지가'는 아카섬 마을회관을 가득메운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어 안 명창의 강강술래에 맞춰 객석이 전부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면서 음악제는 절정에 달했지요. 이 자리에는 신죠 요시코와 카네시마 키쿠에 할머니가 함께 어우러졌습니다.

   
 
  '오키나와전 67년 아카섬 합동위령제'를 집전하는 오춘옥 심방.  
 
6.
"아카시마 섬에서 억울하게 죽은 영신님들, 바람타멍 옵서. 구름타멍 옵서. 깃발보멍 내립서. 넋으로라도 돌아오십서. 강제로 일본 이 섬에 끌려온 영신들 가슴을 풀어주젠 헴수다." '오키나와전 67년 아카섬 합동위령제'. 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둥둥 작은 섬들이 보이는 천성 전망대에서 열린 위령제. 오키나와전의 와중에 미군과 일본군에 의해 죄없이 죽어간 아카섬 사람들, 조선인 군부, 조선의 여성들, 기지 없는 오키나와, 전쟁 없는 세계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렸습니다. 제주 오춘옥 심방이 아린 사설로 집전한 2시간동안의 몰입. 굿이 끝나자 참석자들은 하얀 국화 한송이씩 바다로 던지며, 인정을 걸며, 사라진 넋들을 위로 했습니다.

 주최측 사람들은 2005년 일본 교과서에서 삭제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놓고 분개합니다. 최근엔 일본 자치단체에서는 처음으로,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의회가 나서서 일본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한국과 협의해 해결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하면서 나서고 있는데요. 위안부 문제는 아직도 끝나지 않는 역사입니다. 슬픈 넋들을 달래는 제의가 끝나는 순간, 이 비애의 아카섬엔 제주섬에서처럼 까마귀 소리가 절규처럼 하늘과 바다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끝>

오키나와=허영선(시인/전 제민일보 편집부국장) / ysun6418@hanmail.net


허영선  ysun641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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