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4·3기획단 구성 진통

2001년 1월 17일 이한동 국무총리로부터 위촉장을 받은 기획단 민간인 위원들. 왼쪽부터 김순태·고창후·오문균·강창일·이한동 총리·박원순·강종호·이상근·이경우.

 '폭동' 규정한 국사편찬위 실장 내정 반발
 4개월 긴 진통끝에 박원순 변호사로 결정

4·3기획단 구성 진통
제주4·3위원회 위원 구성이 논란 끝에 2000년 8월 가까스로 매듭이 되었다. 그런데 곧이어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 구성 역시 심한 몸살을 앓았다. 그해 9월에 출범할 예정이던 기획단이 4개월이나 늦은 2001년 1월에야 겨우 발족할 수 있었으니 가히 그 산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획단은 정부 차원의 4·3사건 진상조사와 진상조사보고서 작성이란 막중한 임무를 띠었다. 기획단은 단장을 비롯한 단원 15명으로 구성하도록 돼 있었다. 시행령 제정 과정에서 단원 15명 가운데 8명을 간부 공무원으로 임명한다는 초안이 나와 4·3진영의 강한 반발을 샀다.

결국 기획단은 법무부·국방부·행정자치부·법제처 국장급 공직자와 제주도 부지사 등 공무원 5명과 유족 대표, 관련 전문가를 포함한 민간인 10명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조정됐다. 단장은 위원회 위원장(국무총리)이 단원 중에서 임명하도록 규정됐다.

1차 관문은 민간인 단원 선정 문제였다. 논란 끝에 추천 비율은 학계 3명, 4·3 관련단체·법조계·군경측 추천인사 각각 2명, 유족 1명으로 정해졌다. 여기에서도 4·3진영과 보수진영은 정보전을 펼치면서 막후에서 힘겨루기를 하였다. 각각의 단체에서 2배수의 후보를 추천하도록 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자기 쪽에 유리한 사람을 위촉할 수 있게 노력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민간인 단원으로 강종호(재경4·3유족회장)·강창일(제주4·3연구소장)·고창후(변호사)·김순태(방송대 교수)·도진순(창원대 교수)·박원순(변호사·참여연대 사무처장)·오문균(경찰대 공안문제연구소 연구원)·유재갑(경기대 통일안보복지전문대학원장·대령 예편)·이경우(변호사)·이상근(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사실장)이 선임됐다.

2차 관문은 기획단장 임명 문제였다. 4·3진영에서는 제주4·3연구소장이면서 배재대 교수인 강창일을 단장 후보로 강하게 밀었다. 그런데 그해 10월 국사편찬위원회 이상근 근현대사실장이 단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4·3진영이 발끈했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국사편찬위원회에 대한 불신의 벽이 높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까지도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4·3을 "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발생한 제주도 폭동사건"으로 기술돼 있었다. 진실과 다른 이 규정이 4·3의 논의조차 금기시하는 토대가 됐다.

4·3특별법이 제정된 2000년에 이르러 국사 교과서에 북한 지령설이 삭제되긴 했지만, 국사편찬위원회는 여전히 4·3의 성격을 '폭동'이란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기관의 공무원이 4·3의 진실을 새로운 각도에서 파헤쳐야할 기획단의 수장이 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게 4·3진영의 시각이었다.

2000년 10월4일 제주도내 4·3 관련단체와 제주시민단체협의회는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4·3 기획단장 내정을 즉각 취소하라"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국사편찬위원회가 그동안 4·3의 진실을 어떻게 왜곡·폄훼했는지 사례를 열거하고 "공무원 신분의 사람을 기획단장에 임명하고자 하는 것은 행정자치부가 4·3 기획단을 장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기획단장으로 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사실장을 내정한 것만 아니라 이미 이한동 국무총리로부터 임명 사인까지 받은 상태였다. 일국의 총리가 서명한 내용을 번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에도 4·3범국민위원회 고희범 운영위원장이 발벗고 뛰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천성 기대해 볼 수 있는 곳은 청와대뿐이었다. 수시로 추미애 의원과 연락하면서 청와대 한광덕 비서실장, 김성재 정책수석 등과 협의했다. 청와대 인사들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채 두달이 흘러갔다. 언론은 4·3 기획단의 발족이 마냥 늦어지고 있는 사실을 질타했다. 4·3특별법은 위원회 구성 후 2년 이내에 자료 조사를 하고, 그 후 6개월 이내에 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하도록 시한을 명시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까지 허송세월을 보낼 것이냐"고 지적한 것이다.

2000년 12월말에 이르러 그동안 기획단장으로 거론됐던 두사람을 제외한 제3의 인물을 추대하자는 안이 제기됐다. 그래서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가 추천됐다. 처음엔 본인이 고사했지만 주변의 설득으로 이를 수락했다. 진통을 겪은 후에 기획단은 2001년 1월17일에 발족하였다.

☞다음회는 '4·3 진상조사팀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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