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27> 국내 자료 조사 활동


수백명이 숨진 사건도 기록 한 줄 없다니
소실·폐기 등 국내기관 자료 관리 "허술"

국내 자료 조사 활동
제주4·3위원회 산하 진상조사팀은 국내 자료 조사, 국외 자료 조사, 체험자 증언 조사 등 크게 3가지 방향의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국내 자료 조사는 먼저 4·3 관련 자료 목록 작성부터 시작했다. 이미 발표됐거나 비록 발표되지 않았지만 검색하면 관련 내용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자료 목록 1500종을 작성했다. 그동안 제민일보 4·3취재반, 제주4·3연구소, 제주도의회 4·3특위와 개인 연구자 등의 선행 연구에 의한 축적 자료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번째는 진상조사 대상 기관을 선정하는 일이었다. 국방부·육군본부·해군본부·해병대사령부·기무사령부·정보사령부·군사편찬연구소 등 군 관련 기관과 경찰청·제주경찰청 등 경찰 관련 기관,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 국회 등 모두 19개 기관을 선정했다.

4·3특별법에는 "위원회는 필요한 경우 관계 행정기관 또는 단체에 관계자료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 이 경우 요구를 받은 관계기관 등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해야 한다"는 매우 초보적인 진상조사 조항이 있었다. 이에 근거해 해당 기관에 협조공문을 발송했는데, 국내 어떤 기관도 4·3 관련자료 제출 요청이나 열람에 대해 표면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중요한 기관에서는 진상조사팀이 몇 개월에 걸쳐 상주하며 자료 검색을 했다. 그 대표적인 기관은 서울 소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대전 소재 정부기록보존소, 과천 소재 국사편찬위원회 등이다.

군 기관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제주주둔 주요 지휘관 인적 사항, 경비대의 인사명령, 육군본부의 작전명령, 중앙고등군법회의 명령, 육군 역사일지 등을 입수했다. 그러나 초토화작전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1948년말과 1949년초의 전투 일지나 상황 일지 등은 찾아내지 못했다. 아마 그런 기록조차 없이 그냥 쓸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갔다.

그래도 수확이 있었던 곳은 정부기록보존소였다. 그곳에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 문서, 1949~1950년 국무회의록, 이승만 대통령 유시철과 재가문서, 예규철 등을 입수했다. 특히 정부기록보존소의 수많은 문서 더미 속에서 제주도사태를 "가혹하게 탄압하라"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가 담긴 국무회의록을 찾아냈다. 그것은 사막 한복판에서 바늘 하나를 찾아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일반재판 판결문과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 형무소 수감 중 사망 사실이 적힌 수용자 신분장 등 상당수의 행형자료를 찾아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현대사 관련 국내자료 뿐만 아니라 미국자료도 입수했다. 특히 독립신보·조선중앙일보·한성일보·현대일보·동광신문 등 폐간된 신문 검색을 통해서는 귀중한 4·3 관련 기사들도 발췌할 수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명멸되어 갔던 22개 신문을 모두 뒤져 찾아낸 4·3 관련 기사는 가뜩이나 부족했던 4·3 자료의 빈자리를 많이 채워주었다.

경찰에 대한 자료 조사는 경찰청·제주지방경찰청·제주경찰서·서귀포경찰서 등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진상조사팀은 경찰청 보안국 등 4개 문서고와 제주경찰청 자료실 등을 대상으로 자료 조사를 했지만 4·3과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를 찾지 못했다. 경찰 자료는 사전에 경찰로부터 제출받은 제주작전 전사자 명단 122명과 4·3사건 당시 경찰지휘관 명단이 전부였다.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갖고 있던 4·3 관련자료들이 1960년 4·19 등 정치 격변기에 불태워졌거나 없어졌고, 최종적으론 1981년 3월 내무부의 '연좌제 폐지 지침'에 의해 전부 폐기됐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진상조사팀은 경찰 부서장들로부터 "4·3 관련자료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확인서를 받았다. 나중에 딴 소리 말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내 정부기관의 문서 관리는 한마디로 '허술' 그 자체였다. 그것은 미국과 일본의 자료 관리 체계와 크게 대비됐다. 사흘 만에 345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1949년 4·3 군법회의', 한국 사법사상 최대의 사건인데도 애초부터 판결문조차 만들어진 흔적이 없었고, 하루에 주민 300여명을 집단 처형한 '북촌 민간인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 기록도 한 줄 남겨진 것이 없었다. 그나마 얼마 되지 않던 공문서조차 정치 격변기에 폐기됐다는 것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자료 수집은 꾸준히 추진됐다. 수집한 자료들을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때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분야별 분류작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자료집 발간작업을 추진했다. 

☞다음회는 '국외 자료조사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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