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29> 체험자 증언조사 활동 ①

군 장교 출신자 중에는 증언조사에 적극적으로 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극적이거나 기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진 왼쪽부터 서종철·김정무·유재흥 장군.

김정무 군수참모의 진솔한 증언은 큰 도움
유재흥 장군 "한라산 피난민 많았다" 증언

체험자 증언조사 활동 ①
체험자 증언조사는 대상자 선정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수많은 4·3체험자 가운데 사건 현장에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을 우선 선정하되 각 출신별 균형비율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진상조사팀은 우선 그동안 신문이나 방송, 연구소의 증언집, 제주도의회 피해 신고자료 등 기존 자료에 언급됐던 사건 체험자, 새로 기관 추천을 받은 사람, 자체 발굴한 사람 등 증언대상자 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래서 모집단으로 2870명의 명단을 모았고, 그 명단을 중심으로 다시 500여명을 추려내는 작업을 벌였다. 그 선별 기준은 첫째 특이한 사건의 체험자, 둘째 피해가 심한 마을 출신, 셋째 기관 추천 및 자체 발굴 대상자, 넷째 토벌대와 무장대 경험자 등을 우선 선정했다.

진상조사팀이 증언조사를 하면서 특히 심혈을 기울인 것은 사건 피해자 못지않게 토벌대와 무장대 경험자들에 대한 조사였다. 토벌대나 무장대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한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할 방법으로 증언 채록에 기대를 걸었다.  

제주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군 장교 출신자를 중심으로 실시된 증언조사에서는 두 갈래의 양상이 나타났다. 적극적으로 증언조사에 응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중요 관련자로 판단되는 군 장교 출신 12명에게 4·3위원회의 명의로 협조 공문을 발송했다. 

처음엔 면담을 거부하다가 여러 차례 요청 끝에 만난 사람이 바로 서종철 장군(대장 예편, 육군참모총장·국방장관·한국야구위원회 초대 총재 역임)이다. 서 장군은 유혈 광풍이 휘몰아치던 1948년 그 겨울 제주도에서 9연대 부연대장으로 복무했다. 초토화작전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2002년 9월 필자 등은 서 장군과 면담하기 위해 한강변에 자리 잡은 아파트로 찾아갔다. 사전에 초토화작전의 지휘계통, 미군 고문관과의 관계, 군법회의의 실체, 9연대 프락치 사건의 진상, 계엄령에 대한 인지여부 등 수십 개항의 질문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송요찬 연대장 밑에서 부연대장을 맡은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초토화 등 중요한 질문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너무나 실망스러운 면담이었다.

이에 반해 9연대 군수참모 출신의 김정무 장군(준장 예편·육사2기 동창회장 역임)은 적극적으로 당시 상황을 진술해서 대조적이었다. 김 장군은 "싹 쓸어버린다는 뜻으로 그때에도 '초토작전'이란 말이 있었다"면서 "산에 올라간 무장세력이 중산간마을 등에서 도움을 받으니까 분리시키기 위해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적이다라는 작전개념이었던 같다"고 증언했다.

김 장군은 송요찬 연대장의 포악성에 대한 여러 일화도 이야기했다. 어느날 연대장이 갑자기 자신에게 군법회의 재판장을 맡기며 한 사람을 사형 선고하라고 해서 알아봤더니 '쌀 한말을 폭도에게 줬다'는 게 혐의의 전부였다. 50대 피고인에게 그 사실여부를 물었더니 '집에 찾아온 친척이 양식이 떨어져 굶어죽게 됐으니 양식을 도와 달라 해서 아내가 준 것 뿐'이라고 답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바로 초대 제주도지사를 지낸 박경훈이었다. 김 장군은 자신 생각엔 무죄였지만 연대장이 워낙 엄하게 명령한 지라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연대장에게 보고했더니 그 순간 철모로 머리를 내리치더라는 것이다.

김 장군은 그 무렵 연대 작전참모는 연대장에게 연일 발길질을 당했다고 했다. 자신과 동기인 헌병대장은 밤마다 나갔다와서는 '더 이상 못해 먹겠다'고 고민하다 전근을 가버렸고, 후임 헌병대장은 오히려 사람 죽이는 것을 즐기는 태도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연대 정보참모가 아편주사를 놔달라고 하다가 의사(오창흔)가 거절하자 죽이려 달려들던 것을 자신이 막았다는 이야기도 했다.

군 지휘관 중에 유재흥 장군(중장 예편·국방장관 역임)도 진솔하게 증언조사에 응했다. 그는 송요찬-함병선 연대장이 초토화란 강경 진압작전을 벌였음에도 제주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49년 3월 당시 대령의 신분으로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두달여의 짧은 재임 기간에 해안지대에 주둔했던 진압부대를 산악지대로 이동시켜 본격적인 무장대 소탕전을 벌이는 한편 대대적인 선무작전도 추진했다.

그는 "경비행기로 한라산 주변을 정찰한 결과 중산간 지대는 모두 불탔고, 그런데 한라산 곳곳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보여서 '하산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겠다'는 선무 삐라를 뿌렸다"고 증언했다. 군 지휘관 출신의 입에선 듣기 힘든 '피난민'이란 표현이 나온 것이다. 그것은 실제 상황이었고, 이후 한라산 기슭을 헤매던 수많은 입산 피난민들이 하산의 길을 택하게 된다.

군 장교들을 대상으로 증언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정상적인 진압작전을 했거나 학살극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교적 진솔하게 증언한 반면 유혈의 한복판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점이다.  

☞다음회는 '체험자 증언조사 활동'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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