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30> 체험자 증언조사 활동 ②


김달삼이 강경투쟁 주장…12대7로 의결
무장대 출신자들 "장기전 될 줄 몰랐다"

체험자 증언조사 활동 ②
4·3위원회 진상조사팀은 증언조사를 하면서 제주 진압작전에 참여했던 군 장교 출신자 못지않게 반대진영에 섰던 무장대 경력자 발굴에 신경을 썼다. 토벌대나 무장대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관련자들의 증언이 무엇보다 필요했기 때문이다.

무장대 경력자들을 국내에서 찾기는 힘들었다. 한때 '반공'을 국시로 내세울 만큼 완고한 반공체제의 정치환경에서 그들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그들을 찾기 위해서는 천생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진상조사팀은 일본 현지 조사 과정에서 몇몇 무장대 경력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삼룡(도쿄 거주)이다. 필자와 김종민 전문위원으로 구성된 일본 자료 조사팀은 2002년 7월 도쿄 한 호텔에서 일흔아홉살의 그를 만났다. 제주도청 공무원이었던 그는 4·3 발발 때에는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의 신분으로 김달삼과 함께 대정면 신평리에 있던 도당 아지트에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가 밝힌 무장봉기 결정 과정은 이렇다. 1947년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 이후 응원경찰과 서청에 의한 탄압이 계속되자 1948년 2월말(혹은 3월초) 조천면 신촌에서 도당 책임자와 면당 책임자 등 19명이 모여 대책회의를 했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당시 도당 조직부장인 김달삼이 무장투쟁을 제기했다. 시기상조라는 신중파와 강행하자는 강경파 사이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고, 끝내 12대 7로 무장투쟁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무장투쟁을 주장했다는 이삼룡은 "우린 당초 악질 경찰과 서청을 공격대상으로 삼았지 경비대나 미군과 맞대응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공격한 후 미군이 대응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털어 놓았다. 장기전을 생각지 못했다는 그는 "우리가 정세 파악을 못하고 신중하지 못한 채 김달삼의 바람에 휩쓸린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4·3 발발 당시 남로당 제주읍당 세포였다는 김시종 시인(오사카)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했다. 그는 "'4·3'을 한 3개월 정도 봤다. 6월이면 조천까지는 해방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본토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호응해 올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당시 제주성내는 습격하지 않았는데, 이는 조천 등 외곽을 장악해 읍내를 고립시키면 자연스럽게 접수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1901년 '이재수난'을 연상시키는 회고를 한 그는 "낭만적인 생각들이었다"고 털어 놓았다.

1948년 7월 조천중학원 학생 신분으로 입산한 김민주(도쿄)는 "당시 우리끼리는 '입산은 영광'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임의로 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심사를 거쳐 '등용'된 것이나 다름없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도 "장기전을 생각 못했기에 여름옷만을 입고 그대로 산에 올라갔다"고 말했다. 그는 무장대의 규율은 매우 엄격했고, 이성문제가 발생하자 재판을 열어 집행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1949년 6월 이후 산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이미 질서있는 게릴라라고 하기 어렵고, 이때는 거의 '무질서한 폭도'에 가까웠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오현중학교를 나와 1948년 5월 입산했다는 이순식(도쿄)은 직접 유격대 활동을 한 인물이다. 그는 입산자 중 무장세력은 '유격대'로, 죽창부대는 '면당 특공대'로 불렸다면서 군경 쪽에서 발표하는 '인민해방군'이란 용어는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어떤 지역을 습격할 때에 유격대는 군과 경찰을 상대하고, 식량 약탈 등의 보급 투쟁이나 지목 살인 등은 면당 특공대의 역할로 구분했다고 설명하고, 실제 유격대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유격대는 제주읍에서 서쪽으로 서귀면까지 담당하는 제1지대와 조천면에서 동쪽으로 남원면까지 담당하는 제2지대로 나누어졌고, 자신이 소속했던 제2지대도 30명을 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런 입산자들의 증언을 듣다 보면 무장대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김달삼과 이덕구에 대한 인물 평가도 다소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김달삼은 주로 선동적이고 과격한 인물로 묘사됐다. 그에 반해 이덕구는 과묵하고 인간미가 있었다는 증언이 곳곳에서 나왔다. 김민주는 입산 5개월만인 1948년 12월 은사였던 이덕구를 산에서 만났는데, "이덕구 선생은 내게 '넌 집에서 가만히 공부하지 왜 이런 데 왔느냐'고 꾸중을 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진상조사팀은 한때 4·3에 대한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의 근원이 되었던 박갑동(남로당 지하총책 출신)을 도쿄에서 직접 만나 "그 글은 내가 쓴 것이 아니고 신문에 연재할 때 외부(정보부)에서 다 고쳐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증언을 녹취했다. 그는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된 회고록을 통해 제주4·3에 대해 "남로당 중앙의 지령이 있었다"는 글을 발표, 논란이 됐었다.   

☞다음회는 '조직 내부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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