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31> 조직 내부의 갈등

2001년 8월 제주를 방문한 4·3위원회 위원과 기획단 단원들. 출범 초기에 있었던 내부 갈등도 본격적인 진상조사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면서 점차 사라졌다.

지원단, 조사팀 요청에 "선례 없다" 소극적
이념논쟁 등 쟁점사항 부각되며 차츰 해결

조직 내부의 갈등
4·3위원회 진상조사팀을 이끌던 필자에게 활동 초기에 예상치 못한 시련이 닥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부로부터 오는 갈등이었다.

4·3특별법에 의해 출범한 4·3위원회나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에는 정부 인사만이 아니라 군경 측 민간인 위원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애초부터 치열한 논쟁과 대립이 예고됐다. 따라서 진상조사 작업이나 보고서 작성, 그리고 심사 과정이 만만치 않은 구조였다. 그런 것은 사전에 어느 정도 예견되었기 때문에 서울에 올라갈 때부터 단단히 마음을 다졌다.

역사 속에 은폐되어 있거나 감추어져 있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앞으로의 역사를 진실되게 하려는 노력, 그런 역사의식을 갖고 차근차근 문제를 헤쳐 나가면 어떠한 난관도 뚫고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0여년의 4·3취재반 활동을 통해 다져진 경험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자신감도 있었다.

초기에 4·3위원회의 진상조사 기본방향을 잡을 때도 국방부 측의 반대에 아랑곳을 않고 특별법 제정 취지에 맞게 주민희생 등 인권침해 규명에 역점을 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 국무총리실, 행정자치부, 국방부 등 관련 정부부처 간부 공무원들이 진상조사의 방향에 우려를 표시할 때도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를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엉뚱한 곳에서 비롯됐다. 바로 우리 진상조사팀과 지원단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은 갈등과 간극이 생긴 것이다. 진상조사팀은 본래 보고서작성기획단 소속이었다. 그러나 민간인 출신의 기획단장이 상근 체제가 아니기 때문에 예산 지원과 복무 관계는 정통 공무원 조직인 지원단이 관여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국 역사상 과거사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처음이다 보니 진상조사에 대한 행정지원이 매끄럽지 못했다. 그러니 전문위원이나 조사요원 사이에 불만에 터져 나왔다.

가령, 이런 것이었다. 대전에 있는 정부기록보존소에 파견한 조사팀으로부터 '리더기'(Reader)를 구해주거나 대여해달라는 주문이 왔다. 각종 기록물들이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돼 있기 때문에 이를 판독하기 위해서는 리더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민원실에 구비된 리더기는 다른 민원인들도 사용하고 있어서 30분 이상 활용하기가 어렵다는 애로점을 알려왔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파견된 조사팀으로부터는 복사기를 마련해달라는 주문이 날아왔다. 4·3과 관련된 미군 자료들이 다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민원실 복사기 사용은 제한되어 있어서 조사팀만이 사용할 수 있는 전용 복사기를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문위원 5명, 조사요원 15명을 가동한 진상조사팀이었기에 이런 주문이 수시로 수석전문위원인 나에게 들어왔다.

이런 현안을 가지고 지원단에 가면 대개 "관련 예산이 없다", "규정이 없다", "선례가 없다"는 답변을 곧잘 들었다. 국가기관에서 처음인 진상조사였기에 선례가 있을 턱이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수집된 자료들을 진상조사보고서 작성 때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분야별 분류작업이 필요하고, 이를 위원들에게 보고하기 위해서도 자료집 발간작업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계획안을 제출하자 지원단은 특별법상 '진상조사보고서 작성'만 있을 뿐 '자료집 발간' 규정이 없다면서 반대했다.

결국 지리한 설득 끝에 이런 문제를 풀고, 「제주4·3사건자료집」도 12권이나 만들어냈지만, 그 사이 진이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매사 문제를 푸는 것이 더디게 진행되자 조사팀원 간에는 "편집국장까지 한 사람이 그런 문제 하나 풀지 못하느냐"는 핀잔의 소리가 나왔고, 지원단에선 "아무리 사회에서 그런 위치에 있었더라도 공무원 신분이 됐으면 공직 룰을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 틈새에 내가 끼고 말았다. 정신적으로 매우 힘든 나날들이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그 무렵 4·3위원회 사무실은 경복궁 옆 코오롱빌딩 5층을 사용하고 있었다. 같은 층에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 전문위원실도 있었다. 그런데 민주화 전문위원 사이에서 "4·3위원회 양 수석이 건방지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는 것이다. 내용을 알아본 결과, 복도를 지날 때 인사를 해도 모른 체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에 지나치게 골몰한 나머지 바닥만 보고 다니다 보니 나온 해프닝이었다.

이런 번뇌와 갈등도 진상조사 작업이 진행되고, 기획단 회의에서 쟁점사항들이 집중 논의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이념 논쟁이 본격적으로 뜨거워지면서 이에 대한 대응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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