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32> 행불인 유족회 발족

2000년 3월13일 제주관광민속관에서 열린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 창립대회. 행불유족회는 4·3 진상규명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웠다.

대부분 육지형무소 수감 중 6·25 때 학살
유족들 '남다른 한' 딛고 진상규명에 동참

행불인 유족회 발족
"50여년전 이 땅에서 사라진 사람들/피붙이 갓난애와 젊은 아내, 거동도 어려운 늙은 부모를 뒤로하고/산으로, 지서로, 군부대로/쫓겨가고, 끌려가고/삶의 터전을 뒤로하고 사라져야 했던 삶들/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을 몰라 제사 한번 올리지 못한 불효의 세월/목포로 대구로 대전에서 서대문으로 형무소마다 행방을 찾았으나/끝내 생사조차 확인 못한 기다림의 세월/사회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도/지역사회의 주역으로 삶을 개척해온 기막힌 인생들이 이제 당당히 나섰습니다"

2000년 3월13일 발족한 '제주4·3행방불명인유족회'가 창립 준비를 하면서 제주도민들에게 밝힌 내용이다. 그날 제주시 신산공원 옆 제주관광민속관(현 제주영상센터) 공연장에 모인 행방불명인 유족 400여명은 행불유족회 창립대회를 갖고 "4·3 당시 정당한 재판절차 없이 생명을 빼앗긴 이들에 대한 법적 명예회복과 4·3 진상규명을 위해 치열한 활동을 할 것"을 선언했다.

이날 창립대회에서 임원진으로 공동대표 김문일·박영수·송승문·이중흥·한대범과 감사 강성열·김영훈이 선임됐다. 행불유족회는 4·3 당시 집단학살 암매장지로 예상되는 제주비행장(정뜨르)을 비롯한 학살터에 대한 자료조사와 시신 발굴 작업을 벌이겠다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4·3 당시 희생자 중에는 '시신 없는 희생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군법회의 등을 거쳐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다가 6·25가 터지면서 대부분 집단처형됐다. 군 당국의 선무공작에 따라 "살려준다"는 말을 믿고 하산했다가 목숨을 잃은 청년들도 많았다. 또한 제주도내에서 예비검속이란 미명 아래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 행불 희생자 수가 50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다.

그런 희생자들의 죽음도 억울한 일이지만, 그 가족들의 고초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연좌제란 올가미에 걸려 제대로 취업도 할 수 없었다. 극심한 피해의식 때문에 한때는 유족 스스로가 아버지, 형 등 행방불명된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려왔다. 아니, 그 어머니가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 이야기를 못하도록 막기까지 했다.

부모형제의 사망일조차 몰라서 생일날에 제사를 치르고 숨죽이며 보내온 회한의 세월들, 벌초 때가 되면 가족의 무덤이 없음을 한탄하며 가슴앓이해온 유족들, 그 유족들 중에는 시신은 없지만 고인의 옷가지 등을 묻은 '헛묘'를 만들어 고인을 기리는 사람도 있었다. 4·3유족이라 할지라도 가족의 시신을 찾아 매장한 유족과 그렇지 못한 유족의 한은 달랐다. 스스로가 '기막힌 인생들'이라고 밝힌 그들이 행불유족회 결성을 계기로 당당히 나선 것이다. 

이렇게 행불유족회가 발족하기까지는 '수형인 명부' 발굴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9년 9월 추미애 국회의원이 정부기록보존소로부터 입수하여 공개한 4·3 당시 수형인 명부는 군법회의 1650명, 일반재판 1321명 등 2971명에 이르렀다. 그 수형인 명부를 통해 가족의 이름을 확인한 행불인 유족들이 알음알음 모이기 시작했다. 4·3 군법회의 등이 판결문도 없는 '탁상 재판'이란 사실 등이 알려지면서 그들은 더욱 힘을 냈다.

행불유족회 결성 과정에서 4·3관련단체의 도움도 컸다. 4·3도민연대는 여러 형태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4·3연구소는 수형인 명부 등을 통해 행불 유족들을 찾는데 일조했다.

행불유족회가 결성 후 처음 거행한 행사는 '행방불명인 진혼제'였다. 2000년 4월5일 제1회 행방불명인 진혼제는 유족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제주시 동부두 주정공장 옛터에서 봉행됐다. 주정공장 창고는 4·3 당시 하산했던 사람들이 심문받기 위해 감금되기도 했고, 육지부 형무소로 이송되기 앞서 수감됐던 유서 깊은 곳이다. 행불유족회 송승문 공동대표가 유복자란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난 곳도 바로 이 주장공장 창고(현재의 현대아파트 자리)이었다.

행불 유족들은 그해 5월15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진행된 '4·3유적지 전국 순례'에도 참여했다. 제주4·3도민연대가 처음 주최한 이 행사는 4·3 행불 희생자들이 머물렀던 육지 형무소와 학살터를 돌아보고 5·18기념공원 등 민주 성지를 참배하는 순례였다. 특히 대구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된 곳으로 추정되는 경북 경산시 코발트 광산터와 달성군 가창면 가창댐, 대전형무소 재소자들의 학살터인 대전시 동구 낭월동 속칭 '골령골'에서는 50여년 만에 처음 치러지는 '눈물의 위령제'도 있었다.

행불유족회는 그해 7월8일에 골령골을 다시 찾아 '대전형무소 산내학살 희생자 위령제'를 개최했다. 이 위령제에는 대전 출신 김원웅 국회의원과 대전시민단체 대표들도 참석해 학살 진상규명의 연대 가능성을 높였다. 이런 행사 등을 통해 전의를 다진 행불유족회는 보수진영의 4·3 폄훼시도에 맞서 맨 앞에 나서서 온몸으로 대응하게 된다. 

☞다음회는 '4·3 폄훼에 대한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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