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실찾기 그 길을 다시 밟다 - 양조훈 육필기록] <133> 4·3 폄훼에 대한 대응 ①

 2000년 9월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제주 반란' 발언 파문이 일어나자 4·3단체 대표들이 중앙당사를 항의 방문했다. 왼쪽부터 한나라당 최병렬·양정규 부총재, 김기배 사무총장 등이 앉아있다.

2000년 행불유족회 출범 후 유족회도 변화
한나라당 사무총장 발언파문 땐 강력 항의

4·3 폄훼에 대한 대응 ①
2000년 3월 4·3행방불명인유족회의 발족은 4·3 진상규명운동에 큰 힘이 됐다. 행불유족회는 창립대회에서 밝혔듯이, 4·3 진상규명을 최우선 과제로 제시했다. 기존의 4·3민간인유족회가 유족 복지문제에 비중을 두었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앞에서 밝힌 바 있지만, 4·3민간인유족회는 1988년 태동할 때 '반공'을 기치로 내세웠다. 유족회가 1991년 첫 위령제를 주최할 때 당시 유족회장(경찰 출신)은 추도사에서 "4·3은 엄연한 공산폭동인데 민중봉기라 왜곡하는 현실을 보다 못해 분연히 일어나 힘을 모았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 당시 유족회의 시각은 '이미 공산폭동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웬 진상규명이냐?'는 식이었다. 무장유격대로부터 피해를 입은 반공 유족들이 유족회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6년에 이르러 토벌대에 의해 피해를 입은 유족들이 회장단을 장악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1999년에는 민간인유족회가 4·3특별법 제정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진상규명운동 세력의 일부로 편입하게 됐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이념 논쟁 등 보수진영의 책동에 대응하는 일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런데 행불유족회가 발족하자 양상이 달라졌다. 행불유족들은 보수진영의 4·3 폄훼 시도에 적극적으로 나서 맞서기 시작했다. 민간인유족회도 이에 자극을 받아 적극성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움직임은 1999년 10월부터 시작된 '4·3계엄령 송사'였다. 이 송사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가 제민일보를 상대로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를 한 소송인데, 재판은 이른바 '수형인 명부' 발굴사실이 알려진 직후에 열렸다. 공판이 열릴 때면 행불유족들이 제주지방법원 재판정으로 몰려들었다. 그때는 행불유족회가 본격적으로 출범하기 전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그 숫자가 늘었다.

행불유족회는 발족 직후부터 4·3단체들과 연대해서 보수진영의 헌법소원 심판 청구사건과 4·3시행령 제정을 둘러싼 파동에도 적극 나섰다. 2000년 4월 보수 인사와 예비역 장성 출신 등 15명이 4·3특별법이 위헌이라면서 위헌심판을 청구한데 이어 5월에는 성우회 소속 장성 출신 333명이 역시 헌소를 제기하자 "학살 책임자들과 극우세력의 최후의 몸부림"이라며 즉각 헌소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또 행정자치부가 법제처에 제출한 4·3시행령 최종안이 관 주도로 개악됐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에는 유족들이 4·3관련단체와 합동으로 항의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한나라당 사무총장의 발언 파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해 9월25일 한나라당 김기배 사무총장의 '제주 반란' 발언 파문이 일어나자 4·3진영이 총공세에 나섰다. 한나라당 총재단회의에 앞서 박희태 부총재가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제주에서 열리는 것에 빗대어 "북한 사람들은 서울보다 제주도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하자 김 사무총장이 "제주도는 반란이 일어난 곳이 아니냐"고 받아쳤다는 것이다. 총재가 입장하기 전이어서 여담처럼 한 말이지만 이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파만파의 파장을 일으켰다.

9월27일 4·3관련 7개 단체 대표들이 한나라당 중앙당사를 항의 방문했다. 단체 대표로는 민간인유족회 이상하 부회장, 행불유족회 송승문 공동대표, 백조일손유족회 이도영 이사, 재경유족회 허상수 상임위원장, 도민연대 고성화 공동대표, 연구소 김창후 부소장, 범국민위 고희범 운영위원장 등이었다. 이들을 한나라당 최병렬·양정규 부총재, 현경대·원희룡 의원 등이 맞이했다.

발언 당사자인 김 사무총장은 "그 발언은 4·3을 의식해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제주도민과 4·3 희생자 유족들에게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의 심정으로 사과한다"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항의 방문단은 당사자의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라 한나라당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라고 강하게 촉구했다. 특히 행불유족회 송승문 공동대표는 "나도 한나라당 당원이지만 탈당하겠다. 김 총장도 사퇴하라"고 몰아세웠다.

그런데 그 자리서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김 사무총장이 들어서면서 항의 방문단에 악수를 청하자 현경대 의원 보좌관인 양창윤이 큰 소리로 "뭐 잘했다고 악수를 하는 거야! 당직자가 똑바로 해야지"라고 일갈한 것이다. 양창윤씨(한국저작권위원회 사무처장)는 그날의 일을 회고하며 "지역구 의원들이 앞장서서 4·3특별법도 만들고, 뭔가 4·3문제를 풀려고 노력하던 차에 당직자가 신중하지 못하게 찬물을 끼얹은 격의 발언을 해서 격분했다"면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의도적인 발언이었다"고 말했다.

이 발언 파문은 한나라당이 공식 사과를 표명하면서 일단락됐다. 어쩌면 해프닝성 발언으로 그칠 수도 있는 사안이었지만 4·3진영이 적극 대응함으로써 보수 정당에서도 '반란'이란 용어를 함부로 쓸 수 없도록 쐐기를 박는 효과를 가져왔다.  

☞다음회는 '4·3 폄훼에 대한 대응' 제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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