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4. 그 많던 사슴은?

▲ 과거 하얀 산에서 뛰놀던 옛날의 영화를 그리는 한라산 1100고지의 백록상.
기록만 남은 한라산 서식 큰사슴·꽃사슴 남획으로 1910년대 멸종
순록·대만사슴 대체 계획도 실패…인간 욕심에 ‘한라’ 상징물 잃어

한라산의 상징 ‘흰 사슴’

많은 이들이 한라산이라 하면 먼저 백록담을 떠올릴 것이고, 그와 연관하여 하얀 사슴을 그린다. 백록담이라는 지명 하나만 하더라도 하얀 사슴이 물 마시러 드나들던 못이란 의미를 담고 있으니까.  그리고는 왜 한라산에 사슴이 한 마리도 없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현재 한라산에는 사슴이 없다. 농가에서 사육하던 사슴이 울타리를 뛰쳐나간 경우는 보고되고 있지만.

한라산의 사슴이 사라진 시기는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8년 제주에서 제주도 하계대학 강좌가 열리는데, 이때의 조사결과가 같은 해 문교의 조선 10월호에 발표된다. 여기에 실린 모리 타메조(森 爲三)의 글 '제주도의 육상동물개론'에 의하면 사슴은 1915-6년 무렵 제주읍에 거주하던 가바지마라는 사람이 잡은 것이 마지막이라 전하고 있다. 이후 한라산에서의 사슴은 멸종했다는 것이다. 

송악산 사람발자국화석 유적지에서 나타나는 사슴발자국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전부터 한라산에는 사슴이 뛰놀던 곳이었다. 사슴은 수많은 지명과 더불어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녹하지, 녹산장, 백록리(안덕면 상천리의 옛 이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남사록 등의 기록을 보면 한라산에는 鹿(사슴 녹)자를 쓰는 사슴과 ?(큰 사슴 미)자를 쓰는 큰사슴 두 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큰사슴이라면 보통 대륙사슴으로 불리는 붉은사슴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의 고유종이다. 어음리의 빌레못동굴에서 발견된 동물의 뼈 중에도 대륙사슴이 있었다. 이와는 달리 그냥 사슴이라면 꽃사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루의 경우도 노루와 큰노루 두 종이 있었다. 노루 장(獐)과 큰 노루 궤(麂)로 표기를 달리하고 있다. 큰노루는 고려말 제주를 지배했던 몽골이 원나라에서 들여온 것으로 기록에는 전하고 있다.

어쨌거니 한라산을 상징하는 동물로는 단연 사슴을 꼽을 수 있다. 백록담이라는 이름으로 상징되는 흰 사슴에 대한 기록으로는 조선시대 이형상목사의 남환박물(南宦博物) 등에 의하면 양사영목사(선조19-21년) 와 이경록목사(선조25-32년) 당시에 백록을 사냥했었다고 전해진다. 백록과 관련하여 선경(仙經)에서는 "사슴이 1000살이 되면 색이 푸르고, 또 100세가 되면 흰색으로, 또 500세가 되면 검게 변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백록이라면 적어도 1100세의 나이가 된다는 얘기인데 상상에 맡길 일이다. 김치판관의 기록에 의하면 존자암의 승려 수정의 말을 인용, 하얀 사슴은 영주초 즉 시로미를 즐겨 먹는다고 하였다.

지나친 공물 충당에 사라져가

알다시피 제주에서 사슴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진상품이었다. 사슴과 관련된 진상품으로는 녹용 외에도 사슴의 가죽(녹피), 대록피, 녹포, 혓바닥, 투구 뒤 목가리개 부분을 덮는 장식용 아석, 수레나 가마 등을 덮는 우비를 말하는 안롱(鞍籠) 등이 있다. 이형상의 남환박물에 의하면 매년 사슴가죽 5-60령, 혓바닥 5-60개, 꼬리 5-60개, 말린 고기 200조에 달했다. 이를 위해 제주안무사는 6, 7월의 한창 농사철에 진상품을 핑계로 농민들을 동원, 사냥에 나서니 백성들이 농사철을 잃을 정도였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조선왕조실록 영조45년(1769년) 8월 9일자 기록에 탐라에서 바치는 사슴의 꼬리(鹿尾)를 중지하라 왕이 명하는데 그 이유가 "꼬리 60개를 만들려면 사슴도 60마리가 소요될 것이고, 만약 1년에 두 번 바치면 사슴 또한 120마리"라 했다. 그만큼 백성들이 겪는 고통이 심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하여 1601년 제주를 찾은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매년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온 고을의 군사와 장정을 동원, 사냥을 나서 노루와 사슴을 잡는데 그 양이 매우 많다. 그 가죽은 털을 뽑고 잘 다듬어서 공물(진상품)에 충당하고 뼈는 백골을 만들어 서울에 가서 비단, 명주실, 안료 등과 바꾸어 오게 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값이 비싼 물건과 바꾸기에는 턱없이 모자라 이 명령을 받은 자는 자신의 재산, 우마를 팔아야만 했고 심지어는 부모나 형제, 친족까지 나서야만 해결될 정도였다.

▲ 1702년 교래리 들판에서 사냥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탐라순력도의 교래대렵 장면(부분).
이처럼 잡아들였으니 멸종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실제로 1679년 어사(제주안핵겸순무어사)로 제주를 방문했던 이증의 남사일록에 보면 1680년 1월 26일 한경면 청수리 지경 초악(새신오름)에서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몰이꾼들이 숲에 들어가 사슴을 몰아내면 말을 탄 병사들이 사냥꾼으로 나서는데 이날 하루에 잡은 게 50여 마리에 이른다. 전날 잡은 20여 마리 포함, 이틀 사이에 같은 지역에서 70여 마리를 잡은 셈이다. 1702년 10월 11일 교래리 지경에서 사냥에 나섰던 이형상목사 일행의 경우에는 마군 200명, 걸어서 짐승을 모는 보졸 400명, 포수 120명이 참여해 이날 하루에 사슴 177마리, 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꿩 22마리를 포획했다. 그만큼 사슴이 많았고 또 많이 잡았다는 얘기다.

복원 노력 모두 ‘수포’

이러한 남획의 결과 한라산에서의 사슴은 멸종한다. 그리고는 한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다 50여년만인 1968년에 또다시 등장한다. 한라산 허리에 알래스카산 순록(馴鹿)목장을 조성한다는 계획이 추진된 것이다. 재미동포인 왕종탁이 유진물산을 설립하여 고려축산주식회사와 합작으로 5?16도로 견월악 일대 총 33만평에 순록목장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는 당시 구자춘 지사를 설득해 같은 해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서귀포 포도당공장 준공식에 참석했을 때 알래스카의 사슴목장이 나오는 영화까지 보이면서 정부의 수입허가와 재정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알래스카와 기후풍토가 비슷한 일본 홋가이도에서 왜 사슴을 사육하지 않는지 알아보라"며 충분한 시험단계를 거친 후 추진하도록 했다. 이에 왕종탁과 고려축산은 서둘러 사업을 추진하게 되는데 농협에서 농가소득증대 명목으로 2300만원을 융자받아 한 마리당 10만원씩 240마리를 구입하여 비행기 3대를 전세, 김포공항까지 수송하고 이어 공군 수송기로 제주로 운반한 후 견월악 목장에 방사한다.

하지만 도입 한 달 만에 41두가 쇠파리 유충과 내출혈, 심장혈전증에 의해 폐사한 것을 비롯해 모두 75두가 폐사했다. 이 문제로 구자춘 지사는 다음해 제주를 찾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기도 했다. 나머지 사슴들도 다음해 봄에 방목하자 고사리 중독 등으로 폐사하여 도입 6개월 만에 240두 중 18두만 남는 실패를 겪게 된다. 신토불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이어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라산에 사슴을 복원하자는 주장과 함께 1992년 8월에 5?16도로 수장교 서쪽 200m 지점에 대만산 꽃사슴 암컷 4마리와 수컷 2마리 등 6마리를 방사한데 이어 1993년 6월에 관음사 지구 자원 목장에 암컷 4마리와 수컷 1마리 등 5마리를 또다시 방사된다. 당시 환경 파괴 논란이 일자 제주시에서 병의원을 운영하는 한 의사가 탐라계곡 인근 자신의 목장에 방사한 것이다.

그리고는 1993년 10월 22일 3년생 흰사슴 수컷 한 마리와 꽃사슴 암컷 한 마리 등 사슴 한 쌍이 한라산 700고지인 견월악 부근에 방사한다. 이번에는 경기도 이천군에서 사슴 사육을 하는 독농가가 나섰다. 하지만 당시 방사됐던 사슴들은 1995년까지는 간혹 발견되기도 했으나 이후 완전히 사라진다.

한라산의 사슴을 이야기하면서 옛날 모리셔스 섬에 살던 도도라는 날지 못하는 새를 생각하게 된다. 도도는 모리셔스에만 살던 새인데, 16세기 유럽인들이 이 섬에 상륙한 후 마주잡이로 잡다보니 결국은 멸종, 지구상에서 사라졌다는 비극적인 교훈이다. 지금 한라산에는 사슴이 사라진 자리를 노루가 대신하고 있다. 종다양성을 생각한다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진작가

 

 

저작권자 © 제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